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고군분투하는 윤 대통령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정치는 스포츠 규칙에서 한 수 배워야 한다. 축구의 오프사이드는 주심이 아닌 부심이 깃발을 들어서 판정한다. 공을 다루는 선수를 따라다니는 주심은 서열이 더 높다. 하지만 터치라인 밖에 있는 부심이 공격수와 수비수, 공의 위치와 구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주심은 부심의 판단을 따른다.

무엇을 말하는가. 누구든 내가 가질 수 없는 다양한 관점, 시각을 가진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완전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축구든, 야구든 한 사람에게 판정을 맡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결과에 선수는 승복한다. 나와 다른 견해의 발설(發說)을 방해하고, 어렵게 도달한 합의에 불복하는 정치판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신사적이지 않은가.

초기 어려움 속 방향 잘 잡고 있어
진정성 전해지면 지지율 오를 것
위기 속 권력 내부 전쟁 염치 없어
고통받는 국민이 불쌍하지 않은가

민주정치에서 여(與)와 야(野), 보수와 진보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계층을 대변하거나 중시하는 가치가 달라서 자연스럽게 분화(分化)한 신념 집단이다. 그러니 하나의 사안을 놓고도 성장과 분배, 자유와 평등의 선호 정도에 따라서 시각이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그래야 균형을 통해 극단주의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 다원적 가치가 공존하는 열린 사회가 되는 길이다.

정당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류와 비주류가 공존하면 어떤 변화에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진화생물학의 상식이기도 하다. 탁월한 한 가지 종(種)의 생물만 있다면 단 한 번의 바이러스 공격에도 절멸할 수 있다. 하지만 열등한 종일지라도 함께 섞여 있다면 일부가 살아남아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하나의 깃발, 하나의 구호만 인정하는 정당은 동종교배(同種交配)의 치명적 위험에 눈감은 사교(邪敎) 집단이다.

박정희·전두환 독재를 마감하고 등장한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시대는 민주주의의 성장기였다. 배링턴 무어의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No Bourgeois, No Democracy)”는 경험 법칙이 들어맞았다. 그러나 이후 한국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보면 우울하다.

문재인 세력은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을 이유로 박근혜 정권을 축출했다. 하지만 조국 사태로 공정과 상식을 부정한 ‘내로남불’ 정권임이 드러났다. 중앙지검장, 검찰총장으로 고속 승진시켜 적폐 척결의 선봉에 세웠던 강골 검사 윤석열에게 정권을 내줬다. 생각이 다르다고 야당을 악마화하고 통합, 협치를 거부한 문 정권의 업보(業報)였다.

윤 정권은 달라야 한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presidential) 한다. 야당, 비주류를 인정하고 통합과 협치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문 정권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대 야당과 협치하려는 노력의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윤핵관’과 이준석 대표의 처절한 전쟁은 또 무엇인가. 표면적으로는 9년 전 성접대 의혹 무마를 위해 교사(敎唆)한 혐의가 쟁점이다. 실제로는 생각의 차이가 문제일 것이다. 이준석 대표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한 당원을 대신해 사과했고, 반발을 산 전력이 있다. 민주주의, 공정한 경쟁을 중시하고 끊임없이 이슈를 만들어내는 30대의 젊은 정치인이다. 전통적 보수야당과는 결이 다르다. 이 내전(內戰)의 본질은 2024년 총선 공천권을 거머쥐기 위한 권력투쟁이다.

지금은 경제와 안보의 복합위기 국면이다. 야당과도 스크럼을 짜야 할 판인데 자중지란이다. 생활고로 고통받는 국민이 불쌍하지도 않은가.

다행히 윤 대통령은 경험 부족과 여소야대, 정치적 내전에도 불구하고 방향을 잘 잡아가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의 상징인 청와대 시대에 조종(弔鐘)을 울렸고, 한·미 동맹 강화, 한·일 관계 정상화, 원전 복구에 나섰다. 기업의 활력을 높이는 규제개혁, 공기업 개혁, 노동·연금·교육 개혁 의지도 강하다.

도어스테핑(약식 기자회견)도 참모 뒤에 꽁꽁 숨었던 전임자와는 확실히 다른 소통 방식이다. 장관 업무보고도 독대 형식으로 받겠다니 화끈한 끝장토론이 기대된다. 정책 집행에 속도가 붙을 것이다. 전임자와 달리 팬덤이 없기에 진영정치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높다. 과거에 빚지지 않았고, 구태정치에 포획되지 않은 윤석열만의 진정성을 인정받으면 국정 운영은 순항할 것이다.

문제는 야당과 당내 반대자들을 대하는 정권 핵심 세력들의 적대적 태도에 있다. 박정희·전두환 독재를 견뎌낸 황지우 시인은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너를 기다리는 동안’ 1986년)고 했다. 지금은 누구나 공기처럼 숨쉬는 민주주의는 오랜동안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이었다가 깨어 있는 양심의 희생으로 마침내 우리의 것이 됐다.

그런데 오늘의 못난 정치는 한순간에 소멸될 한 줌의 권력이라도 더 갖기 위해 부끄러움을 잊었다. 단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의 허상을 살해한다. 초유의 퍼펙트 스톰 속에 벌어지고 있는 정권 초기 내전은 명분도, 염치도 없다. 한국 민주주의가 골고다 언덕을 다시 올라가고 있는 것일까. 아주 힘들게 만난 민주주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속죄의 제의(祭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