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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국제표준 채택에 적극 참여하는 게, 기술 선도국 첫 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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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국제표준과 패권전쟁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대표경력을 쓰라고 할 때면 항상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발간하는 국제학술지 ‘과학과 정책(Science and Public Policy)’의 편집장(Editor)직을 첫머리에 쓴다. 벌써 5년이 돼가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논문을 매일같이 읽고, 판정하는 일을 하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올 때가 많다. 그래도 학자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이기에 기꺼이 시간을 낸다. 물론 새로운 키워드가 하나의 학문적 표준으로서 정립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논문마다 나름 독창이라고 주장하지만, 학계에서 인정받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저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인용해주는 동료 연구자들이 많이 축적될 때 비로소 그 분야의 표준적 접근방법으로서 자격을 얻는다. 이처럼 표준의 위치에까지 이르는 중요한 논문들은 학문의 선진국에서만 탄생한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선진국 학자들 간의 밀어주고 당겨주는 암묵적 네트워크도 중요한 기반이 된다.

정상회담 의제로 부상한 기술표준
중국, 기술 국제표준에서도 급부상
ISO 차기회장 선거, 한·중 2파전
전 분야서 국가 역량·관심 모을 때

KT가 지난해 8월 한국과 중국·일본의 대표 연구기관과 양자 암호통신 표준화 워크숍을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사진 KT]

KT가 지난해 8월 한국과 중국·일본의 대표 연구기관과 양자 암호통신 표준화 워크숍을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사진 KT]

솔직히 한국 논문 가운데 미래 학문의 표준을 선도할 만한 싹은 아직 보지 못했다. 선진 연구자들 사이에서 표준으로 자리 잡은 주장과 이론을 한국의 데이터에 적용하거나 개선안을 제시하는 논문이 많기 때문이다. 2020년을 기준으로 한국이 논문 편수로는 세계 12위이지만, 인용 수 기준으로는 아직 세계 34위에 그치는 이유다.

특이한 것은 중국의 사례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전 세계에서 투고되는 논문의 절반가량은 중국대학 혹은 외국대학에 있는 중국계 학자들의 논문이다. 내가 맡은 저널만이 아니라 다른 과학기술분야의 저널도 마찬가지다. 그 논문 중 대다수는 아직 국제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가끔 탁월한 논문들이 빙산의 꼭대기처럼 뾰족이 등장하고 있다. 국제학술지의 편집장들을 만나보면 중국의 논문이 그 분야의 표준으로서 등장할 단계가 머지않았다는 공감대가 있다.

학술적인 논의를 넘어 기술의 세계에 들어가면 문제가 좀 더 심각해진다. 기업의 생사와 국가경쟁력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수없이 많은 기술이 탄생하지만, 업계의 표준이 되는 것은 극소수다. 게다가 같은 분야에서도 대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표준기술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심지어 표준으로 공식 인증되었다고 하더라도 많이 채택되어 살아남는 것은 더 극소수다. 기업들은 자신만의 혁신적 기술이 공식표준(de jure)이든 사실표준(de facto)이든 많은 기업이 채택하도록 해서 시장지배자가 되는 데 관심이 있다. 이때 학술논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기업이 자신의 기술표준을 따르도록 동맹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 관건이다.

표준동맹을 이끄는 데는 기술적 탁월함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표준을 제안한 기업이 앞으로도 계속 그 분야의 표준을 선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기업을 뒷받침하고 있는 국가의 정치외교력과 문화적 영향력, 즉 일류국가로서의 이미지도 중요하다. 이것이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지멘스의 기술을 거의 모든 기업과 국가들이 표준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기반하여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있는 이유다. 삼류국가는 뛰어난 제품을 만들고, 이류국가는 탁월한 기술을 만들지만, 일류국가라야 글로벌 표준을 지배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학술논문과 마찬가지로 기술표준의 세계에서도 중국은 특이한 사례다. 중국은 2003년 무선랜 암호화와 관련하여 중국이 개발한 WAPI(WLAN Authentication and Privacy Infrastructure) 기술을 표준으로 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동맹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내에서 판매되는 모든 무선랜 장비에 WAPI를 채택할 것을 강제로 요구했지만, 미국 등 기술선진국들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당시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연간 1000달러를 갓 넘던 시점이었다. 국제표준을 수입하던 개도국이 국제표준을 주도해보겠다고 나섰다가 국가의 힘이 없으면 국제표준을 이끌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에 분루를 삼켰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많은 기술개발 인력과 투자를 바탕으로 일단 국제표준기구에 엄청난 수의 표준제안을 쏟아내고 있다.

5G 기술이 상용화되기 직전인 2018년 말까지 관련된 국제표준의 제안 숫자 상위 10대 기업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의 삼성과 LG, 2개 기업이 합쳐서 6992개를 제안했을 때, 중국의 화웨이등 4개 기업이 3.5배 많은 2만4365개를 제안했다. 학술논문으로 비유하자면, 일단 많이 투고하고 보는 것이다. 학술논문에서처럼 중국발 제안의 상당 부분이 아직 국제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 위에 뾰족이 얹혀있는 핵심 표준제안들이 점차 많이 채택되고 있다. 게다가 큰 중국 내수시장에다 일대일로에 참여하는 국가들의 시장까지 중국표준을 채택하게 하면서 동맹의 외연을 급속히 확대해나가고 있다.

모든 사람의 혜택을 위해 출발한 표준이 최근 중국의 부상과 함께 국가 간 전략적 게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글로벌 포지티브 섬게임이었던 것이 국가 간 제로섬 게임으로 전환되는 셈이다. 중국의 논리는 전통적인 기술선진국이 지배하는 하나의 표준이 아니라 각 국가가 처한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대안적 표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안을 중국이 제시하겠다는 것인데, 의도대로 실현된다면 글로벌 기술표준이 서구와 중국의 표준으로 나누어지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글로벌 공급망과 무역구조도 분할된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예상되는 미래는 기술표준의 디커플링을 바탕으로 한 글로벌 패권 구도의 양극화다.

미국과 유럽은 2021년 10월 공동으로 무역기술위원회(TTC)를 발족시켰다. 2022년 5월 2차 회담에서는 명시적으로 기술표준 동맹을 선언하고, 나아가 이 동맹을 바탕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안정성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보고서에서 ‘같은 생각을 가진 파트너(like-minded partners)’라는 표현이 무겁게 읽히는 이유다. 2022년 5월 쿼드 회의에서 차세대 기술 분야에서의 기술표준 동맹이 중요한 의제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가치지향과 국제질서를 논의하는 외교무대에서 기술이 핵심 결정요인이자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었다는 뜻이다.

잘 들여다보면 정상회담에서 기술표준을 과제로 제시하는 국가는 미국·프랑스·독일 등 기술 선도국이다. 일례로 2021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오픈 랜(Open LAN)이라는 새로운 기술표준에 한국이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중국도 뒤지지 않는다. 일대일로 회의를 포함해 시진핑 주석이 참여하는 국제적 이벤트의 중요 과제는 대부분 중국의 글로벌 기술표준 리더십 확보와 관련된 것이다.

기술표준을 리드하기 위한 국가적 노력이 잘 드러나는 분야가 국제표준 기구에서의 역할이다. 국제적인 공식표준을 주도하는 3대 기구는 국제표준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인데, 지난 100년 가까이 기술선진국들이 이끌어왔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이 기구들에서 수장을 맡으면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의 글로벌 기술리더십 확보를 위한 국가적 전략이 조금씩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마침 국제표준 기구 중 가장 크고 역사가 오래된 ISO의 차기 회장 선거가 올해 가을로 다가왔다. 예외적으로 개도국이 회장을 맡은 적도 있지만, 대부분 미국·독일·일본 등 기술 선진국들이 회장을 맡아왔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의 장샤오강이 회장을 맡은 바 있고, 현재는 스웨덴의 울리카 프랑케(2022~2024)가 회장을 맡고 있다. 차기 회장을 위한 후보 공모결과 한국과 중국의 2파전으로 압축되었다. 2022년 9월 아부다비 회의에서 최종 결정되는데, 회원국 설득을 위한 중국의 국가적 지원 노력이 집중되고 있다.

중국은 국무원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 산하 중국기계과학연구총원의 이사회 의장인 왕 데청이 출마하였다. 기계과학연구총원은 ‘중국제조 2025’의 핵심지원 기구로 중국의 장비제조 산업의 역량 강화를 뒷받침해온 기관이다. 한국은 현대모비스의 조성환 사장이 출마했다. 기계공학박사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엔지니어다.

ISO의 회장을 맡는 일은 기술자들 혹은 기업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바야흐로 기술 선도국의 일원으로서 국제적 표준을 정립하는 데 당당히 기여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추격국에서 선도국으로 국격을 높이는 국가적 과제다. 산업·기술 및 외교 등 모든 관련 분야의 국가적 역량과 관심이 절실한 때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