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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두께 0.9㎜ 유리잔, 입술 대는 순간 술 온도감 그대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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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6호 26면

[쓰면서도 몰랐던 명품 이야기] ‘쇼토쿠’의 우스하리

달걀 껍질만큼 얇은 유리잔으로 유명한 일본 ‘쇼토쿠’사의 제품들. 사진 윤광준

달걀 껍질만큼 얇은 유리잔으로 유명한 일본 ‘쇼토쿠’사의 제품들. 사진 윤광준

역병이 주춤해지자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더워도 너무 더운 날씨를 견뎌내야 하루 일과는 끝난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해지는 순간이다. 각자의 방식대로 어떤 이는 호프집으로, 또 어떤 이는 분위기 넘치는 술집으로 가게 된다. 생맥주라면 두툼한 손잡이가 달린 500㏄전용 잔에 내줄 것이다. 얼음이 맺힐 만큼 냉각시켰다면 첫 모금에 느껴지는 따가운 탄산의 자극까지 더해진 맥주의 청량감을 맛보게 된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하다.

그런데 이처럼 고조된 맥주 맛은 진짜 맥주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같은 맥주라도 관리 상태가 엉망이고 적정 온도를 지키지 않으면 그 맛은 형편없이 떨어진다. 사람이 몰리는 생맥주집의 비결이란 간단하다. 지킬 것을 제대로 지키고 유지하는 지속의 힘이다. 여기에 더해 잔까지 신경 쓴다면 더 나은 맛을 위한 주인장의 진심이 다가온다.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기막힌 맥주 맛은 술만큼 중요한 잔에서 비롯된다. 맥주회사마다 전용 잔이 있는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술 좋아하는 후배가 들려준 이야기다. 몇 년 전 도쿄 스시 집에서 마신 맥주 맛이 유난히 좋았다고 했다. 잔을 입술에 댄 순간, 찬 맥주의 온도감이 그대로 느껴진 이유는 유난히 얇은 잔 때문이었다. 입술과 맥주를 이어주는 유리잔의 역할을 새삼 실감하게 됐다고. 마치 맨살에 닿는 듯한 감촉까지 마신 셈이다. 산토리 맥주 전용 잔 대신 얇은 잔을 내준 이유를 주인장에게 물었더니 “잔의 역할이 술맛만큼 중요하다는 확신의 선택”이라 답했단다. 자신이 만든 스시에 대한 자부심만큼, 곁들여 마실 맥주 맛의 완성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정성에 놀랐음은 물론이다.

달걀 껍질만큼 얇은 유리잔으로 유명한 일본 ‘쇼토쿠’사의 제품들. 사진 윤광준

달걀 껍질만큼 얇은 유리잔으로 유명한 일본 ‘쇼토쿠’사의 제품들. 사진 윤광준

그때 후배의 맥주 맛을 그토록 맛있게 느껴지게 한 잔은 ‘쇼토쿠(松德)’ 제품이었다. 강렬한 경험 이후 후배는 쇼토쿠 애호가로 바뀌었다. 위스키와 맥주를 즐겨 마시는 후배는 종류별로 쇼토쿠 제품을 사들였고, 마침내 그가 모은 술잔 컬렉션을 보게 됐다.

평소 그가 말했던 것 보다 더 많은 종류의 유리잔을 보고 놀랐다. 각기 다른 시리즈를 크기 별로 구비해 세워놓으니 수십 개가 넘었다. 좋아하는 술조차 감각의 대상으로 삼은 그의 선택은 이유가 있다. 술의 향과 맛을 제대로 즐기고 파악하기 위한 취향의 극대화다. 술잔을 보니 술이 당겼다. 자연스레 낮술로 이어졌다. 잔만 바꾸었을 뿐인데 술맛이 달라지는 경험을 공감했다. 맥주로 시작해 위스키로 이어진 낮술은 각별한 시간으로 남았다. 얇은 잔의 테두리가 입술에 닿는 감촉과 향을 모으기 위해 둥글린 밑면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화제 삼았기 때문이다.

쇼토쿠는 1백년 전 백열전구를 만드는 회사로 출발했다.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으로 만들어낸 쇼토쿠 전구는 빛을 손실 없이 투과시키기 위해 얇고 투명한 유리로 인기 높았다. 하지만 새로운 방식의 램프가 등장해 낮은 에너지 효율의 전구를 퇴출시키자,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쇼토쿠는 유리잔 생산으로 전환했다. 전구 만드는 기술과 얇은 잔의 연결고리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쇼토쿠 유리잔의 두께는 평균 0.9㎜다. 채 1㎜가 되지 않는 유리잔은 달걀껍질을 쥐는 것 마냥 조심스럽다. 이토록 얇은 유리를 만들기 위해 녹은 유리를 알알이 입으로 불어 성형한다고 한다. 기계로 찍어내는 유리잔과 다른 점이다. 두께만 얇은 게 아니다. 쇼토쿠 유리잔은 울룩불룩한 굴곡이 적다. 투명하고 균일한 표면을 유지하고 있어 여러 개를 세워놓아도 중첩된 부분이 변형돼 보이지 않는다. 얇은 잔은 쥐었을 때의 감촉도 색다르다. 유리 질감에 더해진 술의 온도감 때문이다. 매개의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는 직접적 감촉의 쾌감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흠이라면 세게 쥐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유리잔의 내구성이다. 잔을 씻을 때 깨트리는 경우가 많다. 크기가 큰 잔일수록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함은 물론이다.

달걀 껍질만큼 얇은 유리잔으로 유명한 일본 ‘쇼토쿠’사의 제품들. 사진 윤광준

달걀 껍질만큼 얇은 유리잔으로 유명한 일본 ‘쇼토쿠’사의 제품들. 사진 윤광준

겪어보니 세상의 이쁜 것들은 모두 까탈스럽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공통점을 지녔다. 쇼토쿠의 사용자들은 이 부분을 받아들인다. 자주 깨지는 잔의 허약함에 넌덜머리 내고 다른 브랜드의 튼튼한 잔으로 바꾸기도 하지만 바로 쇼토쿠의 감촉과 매력을 대치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다시 쇼토쿠를 사들이는 과정이 반복된다. 대치를 허용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권력만큼 강력하다.

독일 라이프치히에는 응용미술만을 다루는 그라씨 뮤지엄이 있다. 무역으로 큰돈을 번 사업가 그라씨가 개인 수집품 200여만 점과 예술작품을 기증해 세웠다. 민속·음악·공예 세 분야로 나누어진 박물관은 풍성한 볼거리로 세계인의 발길을 끈다. 나의 관심은 공예박물관이다. 세상의 이쁜 물건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안에 있는 유리의 방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투명 유리잔과 접시 같은 그릇만을 모아놓았는데, 층층이 쌓인 유리잔의 투명함과 광채는 실용의 물건을 뛰어넘은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낱개의 사물로 봤을 때 느끼지 못한 유리의 매력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고나 할까. 한동안 멈춰서 발길을 떼지 못한 기억이 선명하다.

이후 와인 잔은 특별히 신경 써 준비해 두었다. 입술에 닿는 림(Rim) 부분의 두께와 손에 쥐는 스템(Stem)은 얇고 가늘수록 좋다. 이를 충족시키는 독일의 리델이나 스코트사 제품을 여러 개 사들였다. 작업실 비원을 찾는 이들과 마시게 될 와인의 풍미와 분위기를 높여줄 중요한 도구들이다. 쓰고 난 와인 잔은 깨끗이 닦아 일렬로 세워둔다. 풍성한 볼륨과 높이를 지닌 보르도 타입과 스템이 짧은 둥근 잔을 군데군데 섞어 놓았다. 투명한 유리잔을 모아두니 얼핏 그라씨 뮤지엄에서 보았던 유리의 방 분위기가 난다. 본 것이 강렬해야 흉내도 내게 마련이다. 유리의 영롱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면 내 삶과 유리잔은 영영 상관없을 뻔 했다.

후배의 쇼토쿠 사랑은 내게도 번져 와인 잔에서 위스키·맥주잔으로 관심 범위를 넓히게 해줬다. 쇼토쿠의 우스하리(일본어로 ‘얇은 유리’란 뜻) 평평한 잔과 굴곡진 변형 타입의 텀블러를 쓰게 됐다. 쇼토쿠의 세트 제품은 나무 향 풍기는 미송 상자에 담겨있다. 정갈하고 단정한 일본식 포장법은 여전하다. 바라던 물건을 갖게 되어 기분이 좋다. 찬 맥주 한 잔의 감흥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윤광준 사진가. 충실한 일상이 주먹 쥔 다짐보다 중요하다는 걸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수술대 위에서 깨달았다. 이후 음악, 미술, 건축과 디자인에 빠져들어 세상의 좋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됐다. 살면서 쓰게 되는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일 또한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심미안 수업』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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