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된 음악 영감, 채소 요리 덕에 되찾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96호 21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콜라보 콘서트 여는 차승민·장진아

푸드 디렉터 장진아(왼쪽)씨가 운영하는 채소친화 식공간 ‘베이스이즈나이스’에서 영감을 얻어 콘서트를 여는 뮤지션 차승민. 정준희 기자

푸드 디렉터 장진아(왼쪽)씨가 운영하는 채소친화 식공간 ‘베이스이즈나이스’에서 영감을 얻어 콘서트를 여는 뮤지션 차승민. 정준희 기자

영감을 어디서 얻으세요? 아티스트에게 물으면 대략 난감해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누가 묻기도 전에 “채소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는 뮤지션을 만났다. 대금 연주자이자 작곡가 차승민이다. 그가 ‘2022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콘서트 ‘베이스이즈나이스’(19일 국립극장 하늘극장)는 ‘채소 친화 식공간’을 표방한 작은 식당 이름이다.

정확히 말하면 채소 요리와, 그 요리를 만든 식당 주인인 푸드 디렉터 장진아 대표가 영감을 줬다. 두 사람이 만나 공연을 만들기까지의 이야기는 차승민이 작곡한 음악과 두 사람의 다큐멘터리 영상에 담겨 콘서트를 구성한다. 실제 무대 위에 등장하는 건 차승민이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음악그룹 ‘시로’지만, 영상에 출연한 장진아와 영상을 찍은 최강희 감독이 모두 ‘연주자’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이색적인 공연이다.

차씨, 교통사고로 한때 음악 포기

차승민과 장진아 사이 오작교를 놓은 건 여우락 예술감독 박우재다. ‘베이스이즈나이스’의 단골손님이던 그가 어느날 “이 식공간에서 경험한 감상을 음악에 녹여 공연을 만들고 싶다”면서 둘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장 대표는 그 말을 듣고 “감개무량했다”고. “3년 전 이 곳을 열고 많은 일이 있었어요. 미쉐린 가이드 빕구르망에 오르고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 에센스 오브 아시아’에 선정되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 맛을 넘어 영감을 준다는 것은 다른 차원이잖아요. 본인이 생각해둔 음악가가 제 고향인 제주도에 산다고 해서, 제주도까지 달려가 첫미팅을 했죠.”(장)

그런데 당시 차승민은 음악을 포기한 상태였다. 한때 방송 다큐멘터리를 찍을 정도로 주목받는 뮤지션이었지만 “음악을 더 잘하기 위해” 전력질주를 계속하다 3년 전 번아웃과 공황장애가 찾아왔고, 요양차 머물던 제주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대금 연주가 어렵게 됐다. 때마침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치면서 영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음악을 다시 하게 된 계기가 음식이 된 것이다.

“처음엔 고사했어요. 대금을 예전의 10%만 불어도 마비가 오니까요. 그런데 진아님 음식을 먹으면서 공연이 하나씩 펼쳐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울면서 밥을 먹었죠. 맛있다는 감각을 넘어 놀라운 맛인데, ‘내가 왜 울지’ 싶으면서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장이 훅 펼쳐지더군요. 그동안 음악을 내려놓고 명상을 하면서 나름 나를 돌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자랐던 거예요. 음식이 나를 볼 수 있는 창구를 열어준 거죠.”(차)

장진아씨가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만든 채소 밥상. 된장과 참깨로 양념해 구운 연근, 옥수수, 줄기콩 등 채소를 주인공 삼았다. 정준희 기자

장진아씨가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만든 채소 밥상. 된장과 참깨로 양념해 구운 연근, 옥수수, 줄기콩 등 채소를 주인공 삼았다. 정준희 기자

“그게 바로 채소의 힘”이라니 맛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연근, 줄기콩 등 보통의 식탁에서 조연에 불과한 채소들을 하나하나 주인공으로 정성껏 살려냈는데, 과연 그 맛이 놀랍다. 된장과 참깨로 양념해 구운 연근이 은근히 숯불갈비의 풍미를 내고, 추청미에 찹쌀을 섞어 지었다는 밥은 한톨 한톨 꿀을 바른 것 같다. 유기농을 고집하는 것도, 멀리 농부와 직거래를 하는 것도 아니라 가까운 마트에서 쉽게 산 재료로 만들었다는 데 방점이 찍힌다. ‘출신이 어떻건 누구나 자기의 근본으로 빛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아서다.

“손님들이 대부분 엄마를 떠올렸다거나 행복, 위로 같은 단어를 피드백으로 주세요. 값비싼 재료도 아니고 늘 가까이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채소일 뿐인데. 그런 너그러움과 소탈함으로 사람을 보듬는 게 채소의 힘 아닐까요.”(장) “채소의 힘을 느끼기 전에 저는 이 공간에서 제주도 자연에 안긴 느낌을 받았어요. 아픈 상태에서 첫 미팅 때부터 진아님의 화사하고 따뜻한 인간됨에 매료됐고, 뭔가 초대받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음식 앞에서도 자연에서 내리쬐는 햇살처럼 환대를 받는 느낌이었고, 나를 찾는 과정이 이런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이었구나 싶었죠.”(차)

콜라보를 결심한 두 사람이 소통 과정에서 찾은 콘서트의 키워드는 ‘회복’이다. 카페베네 뉴욕 1호점을 시작으로 현지에서 여러 한식당을 기획하며 화려한 커리어를 쌓은 장진아에게도 ‘베이스이즈나이스’라는 공간에서 보낸 3년의 시간은 회복의 시간이었단다. 무슨 뜻일까. “10년 정도 뉴욕에서 열심히 달리다가 속도를 낮추고 돌아오기로 선택을 했던 건데, 막상 와보니 그 선택 이면에는 상실감과 공허함이 있더군요. 이곳에서의 3년은 뉴욕에서의 삶과 건강하게 이별하는 회복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커리어의 성장이 아니라 인간 장진아가 스스로를 돌보고 지켜내는 시간이었던 거죠.”(장)

‘회복’을 이야기하지만, 겉보기만으로 장진아는 상처가 없어 보였다. 그저 성공한 커리어우먼으로 세상을 활기차게 살아가는,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육신의 상처를 입고 명상을 하며 세상과 거리를 두어 온 차승민과 공감대가 넓지 않을 것 같았다. 차씨도 “진아님과 대화하며 엄청난 에너지를 받는다. 심리상담을 받는 것처럼 계속 응원의 메시지와 용기를 주는 사람인데, 저 단단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했다”고 했다.

“뉴욕에서의 시간을 사랑하지만, 외국인으로 산다는 건 땅에 발이 닿지 않고 붕 떠있는 것만큼의 간극이 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도망가고 싶어서 심리치료도 받았죠. 나를 너무 방치해 왔다는 걸 깨닫고 나 자신에게 미안해지면서, 한달 정도 회사를 쉬고 매일 내가 원하는 걸 하나씩 해줬어요. 책임만 다하며 ‘빡세게’ 살다가 처음 나를 돌보는 개념이 생긴 거예요. 나를 이해하니 타인도 이해하게 됐고,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여유를 찾았죠. 그래서 누군가에게 건강한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것 같아요.”(장)

장씨, 뉴욕서 돌아와 채소 친화 식당 차려

장진아(위)와 차승민. [사진 국립극장]

장진아(위)와 차승민. [사진 국립극장]

콘서트의 구성은 두 사람이 만나 공연에 이르기까지의 스토리텔링이다. 조명, 소품 등으로 식공간의 따사로운 감성을 옮겨놓은 무대에서 ‘환영의 온도’부터 ‘위로의 언어’, ‘회복의 시간’을 거쳐 ‘베이스이즈나이스’까지 테마를 따라 영상과 연주가 교차된다. 오랜만에 음악으로 돌아온 차승민은 과거의 작업방식과 전혀 다른 경험을 하는 중이다.

“몸 안에서 풍경이 펼쳐지는 경험을 했으니까요. 전에는 머리를 써서 선율을 만들었다면, 이번엔 증폭된 감각을 느끼면서 내가 나를 기다려주는 작곡 과정 자체가 회복의 시간이었어요. 예전에 표면적으로 가슴 언저리의 음악을 했다면, 내면의 힘을 느끼면서 우리 모두를 위한 헌정곡처럼 만들게 된 거죠. 연주 멤버들에게도 재료만 주고 그들이 각자 요리를 만들어내는 걸 경이롭게 바라보는 저를 발견하는 중입니다.”(차)

3년여 음악을 내려놓았었던 만큼 작업에 무리가 없는 건 아니다. 대금 연주도 전처럼 기교를 부릴 수 없다. “조심조심 심플하게 하면서 명상의 힘으로 극복하고 있어요. 천천히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를 떨어져서 보면서 진행중이에요. 이번 공연은 여러가지로 도전의 의미가 있거든요. 진아님이 뉴욕에서 붕 떠 있었던 것처럼 저는 서울에서 조급하고 불안해하며 붕 떠있는 상태에서 제주로 내려갔던 거니까요. 제주도에서 3년간 땅의 감각과 뿌리의 힘을 충분히 느끼며 살았는데, 제주도 자연의 보호만 받다가 서울로 돌아올 수 있는 나를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아요.”(차)

이 프로젝트를 통해 차승민이 치유를 얻었다면 장진아는 음악을 얻었다. 한식에 대해 가진 확신만큼 국악을 더 발견해 보고픈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저는 뉴욕이란 도시에서 한식을 이야기하던 사람이잖아요. 김치 하나만 해도 겉절이부터 묵은지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맛을 느끼는 감각을 가진 게 한국인의 경쟁력이라 생각해 왔는데, 이번 기회에 음악에서도 비슷한 걸 느꼈어요. 작은 북 하나에도 감정 표현이 있고, 박우재 감독의 거문고에는 서양 현악기의 애잔함이나 구슬픔, 묵직함과는 다른 광활함이 있더군요. 승민님이 이번에 만든 음악에선 수식하지 않아도 충분히 풍요로운 느낌을 받았고요.”(장)

두 사람에게 만남을 청했던 건 ‘음악과 음식의 콜라보 공연’이란 게 낯설어서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엔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리틀 포레스트’, ‘카모메식당’ 같은 일본 음식영화에서 느꼈던 따사로움이다. 사실 우리같은 보통 사람도 식탁에 비유하면 채소반찬 같은 신세다. ‘베이스이즈나이스’가 채소를 제대로 주인공으로 때빼고 광내준 것처럼, 누구나 자기의 근본으로 빛날 수 있다며 위로해주는 공연이 될 것 같아 벌써부터 훈훈해진다.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해요. 여우락 공연을 선택해서 오시는 관객들은 이미 그런 시간을 찾은 걸 테죠. 공연은 제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공통된 이야기가 될꺼에요. ‘내가 찾고자 했던 나’를 함께 느꼈으면 합니다.”(차) “제가 몇년 전 낸 책의 부제가 ‘나를 돌보는 마음으로부터’거든요. 그 마음엔 좋은 것 밖에 없어요. 위로, 응원, 칭찬, 격려. 나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면, 남에게도 그럴 수 있다 생각해요.”(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