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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 루트로 150만 명 월남, 돈 받고 안내해준 ‘38꾼’ 활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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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6호 27면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4〉 폐허된 ‘38선쉼터’

38선쉼터에서 바라본 소양호 풍경.

38선쉼터에서 바라본 소양호 풍경.

폐허가 흉하게만 보이는 건 아니다. 폐허의 미학이 작동하여 사진기를 꺼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기 고향도 아니지만 뭔지 모를 회고감을 끌어내기도 한다.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누군가가 들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거나, 누군가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 것 같은 감성이 뭉글뭉글 솟아나기도 한다.

소양호 조망이 참 좋은 곳에 있는, 지금은 폐업한 38선쉼터(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소양호로 650)도 그렇다. 소양호로는 소양강댐의 북안을 따라 꼬불꼬불 흘러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춘천에서 양구로 가는 외길이었다. 그러나 2006년 수인터널이 개통되면서 통행량이 거의 없어졌고 38선쉼터는 폐허가 됐다. 나의 휴전선 답사여행에 동반했던 화가 윤지원은 이곳 풍광에 자신을 얹은 ‘38선쉼터(130㎝×89㎝)’라는 작품을 전시회에 냈다. 한국전쟁이란 현대사를 밟아보는 자신을 그린 것 같다.

2006년 수인터널 개통으로 통행량이 떨어져 폐허가 된 38선쉼터.

2006년 수인터널 개통으로 통행량이 떨어져 폐허가 된 38선쉼터.

38선쉼터는 소양호 전망이 아주 좋지만, 교통은 좋지 않다. 멀리 둘러싸고 있는 첩첩의 능선과 발아래의 급경사를 보면 쉽게 짐작이 간다. 이렇게 깊은 산과 강에도 38선은 어김없이 그어졌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숨 가쁘게 산길을 오르고 숨 고르며 강물을 건넜다. 그걸 월남이나 월북이라 했다.

직업적 안내인·짐꾼들 돈벌이 짭짤

월남 루트로 이용된 고랑포구의 1930년대 모습.

월남 루트로 이용된 고랑포구의 1930년대 모습.

월남 루트는 동서에 걸쳐 아홉 개가 있었다. 해상루트는 동해와 서해 둘이 있었고, 철도(해주선·경의선·경원선·동해북부선)를 따라가는 네 개의 루트, 그리고 철도 노선 사이로 세 개의 루트가 있었다.

서해에서는 황해도 북부와 평안도에서 배를 타고 연안(황해도) 인천 한강하구에서 하선했다. 동해에서는 원산 등지에서 주문진·묵호·포항·방어진(울산) 부산으로 연결되었다. 경의선을 따라와서는 북쪽의 금교역에서 남쪽의 토성까지 걸어서 통과했다. 해주선을 이용하여 학현역까지 와서는 청단까지의 산길 20㎞를 건너기도 했다. 경원선은 북에서는 복계역(철원역의 북쪽 세 번째 역)까지만 운행했기 때문에 복계역부터 걸어서 포천·동두천 또는 고랑포구(연천)로 남하했다. 동해북부선의 종착역이었던 양양과 남쪽의 주문진 사이 28㎞ 구간을 걸어서 월남하기도 했다.

철도 노선이 아닌 루트는, 해주선과 경의선 중간의 산길을 거쳐 연안에 이르는 루트와, 경원선의 서부 산간 지역을 통과하여 이천(강원도)·고랑포·장단·개성으로 이어지는 루트도 이용됐다. 마지막으로 경원선 동부 지역으로 북쪽의 준양(강원도)을 경유해 춘천으로 연결하는 경로가 있었다. 바로 북한강과 소양강을 건너야 하는 루트다.

월남 루트라고는 하지만 이미 누구나 이동하고 어떤 물자든 운송되는 기존의 교통망이었다. 다만 38선에서는 소련군과 북한 내무기관의 초소를 피하기 위해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안내가 필요했다. 이로 인해 직업적인 월남 안내인과 짐꾼이 생겨났으니 이들이 월남 루트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안내비는 300~500원 정도, 당시 노동자 월급이 1000원 수준이었으니 상당히 짭짤한 돈벌이였다. 짐꾼의 보수는 더 컸다. 북한에서 38경비대·38보안대·소련군·자위대 등이 월경을 통제했지만, 월남 시도는 대부분 성공했다. 강원도 인제군의 경우 노동당원 288명이 월남을 시도했는데 체포된 당원은 4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례가 그런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주지하다시피 38선이라는 남북의 인위적인 구분선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소련과 미국이 합의해 우리도 모르게 그어졌다. 미군이든 소련군이든 처음부터 엄격하게 통제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내지 또는 만주, 소련의 연해주 등에서 귀국하거나, 북한 지역에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재산을 포기하고 맨몸으로 귀국하는 일본인도 적지 않았다. “모든 월남자는 즉각 ○○ 경찰에게 신고하여야 한다”고 38선의 남쪽 도로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일본어·영어·한글 순으로 쓰여 있었다.

1946년 초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수송력이 허락하는 한도’에서의 왕래를 허용한다는 원칙에 합의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실행방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봉쇄 국면으로 기울어갔다. 1946년 3월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시행되자 망명과 다를 바 없는 정치적 월남이 급증한 탓에 전체 월남자 숫자가 증가하여 3월 3만4670명, 4월 5만450명을 기록했다. 이것은 한국전쟁 이전의 월별 숫자로는 각각 3위, 1위에 해당한다.

월남하다가 체포되면 군인이나 군무원은 소련군에게 인계되고, 그 외에는 구호소에 수용되었다. 북한은 내무기관의 지침으로 월경 행위를 처벌했다. 1946년 5월 미군정은 무허가 월경을 금지했다. 같은 해 6~8월에는 콜레라가 퍼지면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38선의 육상·해상 교통을 모두 차단한다고 발표했다. 질병마저도 38선을 점점 더 얼어붙게 한 것이다. 38선은 이미 국경선과 다를 바 없었다. 1947년에도 월남은 갈수록 어려워졌으나 월남 시도는 계속됐다. 여름에는 북한의 식량난으로 인해, 12월에는 북한 화폐개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급증하기도 했다.

동두천·의정부·주문진 등에 수용소

한국전쟁이란 현대사를 밟고 있는 자신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화가 윤지원의 ‘38선쉼터(130*89㎝).’

한국전쟁이란 현대사를 밟고 있는 자신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화가 윤지원의 ‘38선쉼터(130*89㎝).’

1948년 9월 북한이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후에는 아예 형법에 불법월경죄가 명시됐다. 직업적으로 월경을 돕거나 공무원이 월경을 도운 것도 처벌 대상이었다. 남북이 제각각 정부를 수립하자 38선은 적대적인 국경이 되었다. 월남은 본인은 물론이요 가족의 안위가 걸린 결단이어야만 했다.

남한과 미군은 북한과 소련군의 월경 통제에 비해 관대한 편이었다. 당시의 삐라에는 “국군 정방 50m까지 와서 무기를 내려놓고 ‘이승만 박사’ 만세를 외치면 귀순으로 인정해 보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월남 수용조건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허술했으나 아무튼 월남금지가 아닌 월남수용의 태도가 깔렸다.

그렇다고 해서 파란불에 횡단보도 건너듯 월남한 것은 아니었다. 38선을 따라 황해도의 청단, 경기도의 토성·개성·동두천·의정부, 강원도의 주문진과 춘천에 수용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울에도 수용소가 하나 있었다. 월남자들은 수용소에서 개인별 심문을 거쳐야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갔을까. 학계의 추정치는 월남 150만, 월북 30~35만이다. 1947년 6~7월에 개성의 수용소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조사대상 3만1859명 가운데 생활난(2만731명 65.1%)과 귀향(9400명 29.5%)이 주된 이유였다. 구직과 진학이 각각 82명(0.3%), 892명(2.8%)이었고 상행위가 252명(0.8%), 가장 많을 것 같은 사상적 이유는 502명(1.6%)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적 사상적 이유가 있어도 굳이 발설하지 않은 월남자도 있었을 것이니 숫자 그대로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치적 월남은 조사에서는 소수지만 영향력은 강력했다. 북한에서 인민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민주개혁과 토지개혁을 실행하여 친일그룹과 식자층 지주층을 궁지로 내몰았다. 그들은 남한으로 와서는 호구지책이든 아니든 군대·경찰·서북청년단 등 강력한 반북한 조직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에게는 이미 원한과 복수라는 데칼코마니가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서울과 평양의 두 권력은 강력한 구심력과 원심력을 휘둘렀다. 저편을 밀어내고 자기편을 끌어당겼다. 북한의 우익은 남으로, 남한의 좌익은 북으로 이동했다. 자기편이 강화되면서 동시에 자신의 반대편도 강력해지는 역설적인 과정이 계속됐다. 월남과 월북을 통해서 남한의 우익은 극우로, 북한의 좌익은 극좌로 치달았다.

통계로 잡힌 정치적 월남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생활난으로 월남한 빈농층이 가장 큰 비중을 점했다. 그러나 실제로 38선을 가장 많이 넘나든 것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전문 38꾼들, 곧 밀무역 상인과 월경 안내인이었다. 상인들은 월경 안내와 짐꾼을 겸하기도 했다. 하나의 경제공동체였던 조선이 남북으로 분리되자 다종다양한 물자 수요공급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 작게는 38선으로 집과 논밭이 갈리기도 하고 시장이 건너편에서 열리기도 했다. 크게는 남한은 중공업 화학제품이나 전기가 부족했고 북한은 경공업 생필품이 부족했다. 수요와 공급의 차이는 곧 이윤이었고, 이윤이 크자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 월경 상인들이 크게 늘었다.

전쟁 전이라지만 처벌 가능성이 상존하는 38선 지역에서도 생업이 활발했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는가. 어떤 시대 상황에서도 인간의 실제 행위의 대부분은 일상과 생업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38선으로 느닷없이 갈라진 땅의 백성들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동안, 38선을 긋거나 그것에 기댄 상하좌우의 권력들은, 미국이든 소련이든, 남한이든 북한이든, 시국을 폭발의 임계점으로 밀어가고 있었다. 각론으로는 상호비방 속의 갈등과 충돌이지만 총론으로는 적대적 합작이었다.

윤태옥 답사여행객 kimyto@naver.com
지난 15년 동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역사와 자연과 문화를 찾아다니고 있다. 최근 2년은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휴전선 지역, 바다의 역사를 주제로 한 서해·남해·제주 지역을 답사했다. 올해에는 바다의 역사 해외 여정을 시작한다. 여행하면서 『변방의 인문학』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등을 펴냈다. https://blog.naver.com/kimy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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