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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주·궁합 ‘MBTI 열풍’]기업 채용에도 등장한 MBTI, 20~30대 83% “내 성격 일치” 탐색 좋지만 맹신 금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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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6호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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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 면접을 앞두고 인사 담당자가 MBTI를 묻더라고요. INTJ라고 답했더니 ‘I 쪽은 내성적이라 영업분야와는 잘 맞지 않는데...’라고 말끝을 흐리더군요.”

대학 졸업반인 이형민(26)씨는 최근 한 무역회사의 면접에서 탈락했다. 그는 “합격하지 못한 게 MBTI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기업이 좋아한다는 E 유형이라고 할걸 후회가 됐다”고 말했다. 2019년 말부터 인터넷 놀이의 하나로 유행하기 시작한 MBTI가 채용의 한 과정이 될 정도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실제로 채용 사이트에서 ‘특정 유형은 지원 불가’ ‘MBTI 결과 필수 제출’ 등의 내용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최근 한 은행에서는 ‘자신의 MBTI 유형 및 장단점을 소개하고, 이를 기반으로 적합한 업무를 쓰라’는 자기소개서 항목을 내놨다가 논란을 빚기도 했다. MBTI 유형별로 맞춤상품을 내놓는 등 마케팅에 활용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한 성격 검사 결과에 과몰입해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우려한다.

성격유형 검사의 일종인 마이어스 브릭스 유형 지표(MBTI, Myers-Briggs Type Indicator)는 1944년 미국의 작가 캐서린 쿡 브릭스와 그의 딸 이사벨 마이어스가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의 이론을 토대로 만든 성격 검사다. 관심의 방향에 따라 E(외향)-I(내향), 사람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S(감각)-N(직관), 판단의 근거에 따라 T(사고)-F(감정), 선호하는 생활 양식에 따라 J(판단)-P(인식)으로 나누고 4가지 유형을 결합해 16가지로 성격을 분류한다. INFP는 잔다르크형, ESTJ는 사업가형으로 분류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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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성격유형, 존중·인정받게 해줘”

근 80년 전에 만들어진 성격 검사가 갑자기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 문화의 확산과 주로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MZ세대의 특성이 맞물린 결과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과 잘 맞는지 궁금해하는 자아탐구 열풍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사주팔자로 사람의 성격과 미래를 예측하고, 별자리나 혈액형에 성격이나 성향을 부여해 타인을 평가, 규정하는 현상은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별자리·혈액형이 성격과 무관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16가지로 분류해 과학적으로 보이는 MBTI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0분 내외로 MBTI를 측정할 수 있는 인터넷 간이 검사가 확산하면서 대중화됐다.

실제로 MZ세대에게 MBTI란 이름, 성별, 나이만큼 중요한 자기소개 수단이다. 한국리서치에 따르면 18~29세 응답자 중 약 81%, 30대 응답자 중 약 57%가 MBTI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응답했다. 자신의 성격과 MBTI 결과가 일치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83%에 달했다. 젊은 세대일수록 MBTI를 믿는다. 18~29세의 52%가, 30대는 34%가 검사를 신뢰한다고 답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자신을 INTP 형이라고 소개한 직장인 송지미(29)씨는 내향적인 성향에 맞춰 하루 한 개 이상의 약속은 잡지 않고, 부족한 공감 능력을 기르기 위해 타인이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자주 고민한다. 엉뚱한 상상을 한다고 야단을 맞기도 했지만, 이를 장점으로 삼아 평소 상상하던 내용을 소설로 엮어 책을 내기도 했다. 송씨는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정해진 삶을 살아가길 강요받았는데 이제야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고 있다”며 “MBTI 열풍으로 다양한 성격유형이 존중받고, 인정받는 사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MZ세대가 MBTI에 빠진 근본적인 이유는 급변하는 사회환경에서 안정된 삶을 찾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됐다. 신분, 학력, 직장 등이 삶을 대변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소속된 조직이나 집단이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 대신 성격 유형이 자신을 설명하는 역할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직장인 김수영(25·가명)씨는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나는 이런 MBTI라서 그렇지’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고, 상처도 덜 받게 된다”며 “사주를 보면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이 잦아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박선웅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는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인류 초기부터 이어져 오던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대학 졸업, 취업, 결혼, 출산 등 정해진 순서대로 사는 삶이 정답인 줄 알았던 기성세대와 달리 MZ세대는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세대”라며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답 또한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하기에 자아탐구에 열중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10분 내외 인터넷 간이 검사로 대중화

코로나19 확산 이후 자리 잡은 언택트 문화 또한 MBTI 열풍에 기폭제가 됐다. 기성세대는 오프라인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 오랜 시간을 보내며 관계를 맺을 수 있었지만, 타인과 긴 시간 마주할 기회가 줄어든 비대면 사회에서는 서로를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MBTI를 쓰는 것이다. 특히 디지털 기기 활용에 익숙한 MZ세대는 키워드로 나와 상대방을 규정하는 것에 거부감이 적다. 직장인 심서희(25)씨는 “상대방의 MBTI 유형을 파악하면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눠보지 않아도 그 사람의 세계를 알 수 있다”며 “반대로 나 자신을 소개할 때도 4글자로 설명할 수 있으니 인간관계를 쌓기에 편리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임선영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는 “모바일에서 몇 가지 문항만으로 자신과 타인의 성격유형을 분석해준다는 점이 MZ세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며 “기성세대보다 심리적 특성에 관심이 많고,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타인을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보니 심리검사 수단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자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문제는 MBTI 자체의 신뢰도가 높지 않은데다 특정 검사 결과만으로 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이다. MBTI는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문가가 칼 융의 심리유형론을 독학해 만든 지표다. 통계적으로도 성격 분포가 뚜렷하게 다른 집단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예를 들어 외향형(E)과 내향형(I) 집단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규분포를 이룬다. 미미한 점수차때문에 한쪽으로 살짝 치우친 것을 근거로 사람을 서로 다른 집단으로 분류하는 셈이다. 게다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평가하는 자기 보고식 심리 검사라 시행할 때마다 결과가 다를 수 있다. 그나마 정식 MBTI 검사도 아닌 ‘16유형(16Personalities)’ 같은 간단한 무료 인터넷 검사는 더더욱 신뢰도가 낮다.

심리학계에서는 1943년 심리학자 스타크 해서웨이와 존 맥킨리가 정신건강 진단을 위해 개발한 ‘MMPI’ 성격 검사를 주로 활용한다. 566개의 문항을 토대로 성격 유형과 정신건강상태를 각각 평가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유형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인기가 없다. 임 교수는 “MBTI는 MMPI 등 다른 심리검사에 비해 타당도와 신뢰도가 부족한 편”이라며 “심리검사가 자아탐구에 도움이 되려면 전문가가 검사에 참여해 결과를 해석하고 상담까지 진행해줘야 하는데 이런 과정조차 거치지 않은 온라인 자가 검사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MBTI, 업무 능력과 아무런 상관 없어”

전문가들은 MZ세대가 자아탐구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기성세대의 경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시간이나 물리적인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지만 MZ세대는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탐구하고, 누릴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풍부하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집단주의 경향이 강한 기성세대는 조직을 위해 충성하는 게 기본이었지만 MZ세대는 ‘나 자신’이 중요한 세대”라며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직업이 나와 맞는지 끊임없이 탐구하고 싶어하고, 이러한 것에 시간을 쏟는 일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기성세대라면 굳이 돈과 시간을 들이지 않는 심리상담, 명상 등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박선웅 교수는 “틀에 박힌 삶에 익숙했던 한국 사회가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공을 들인다는 건 긍정적인 변화”라고 평했다.

다만 특정 유형을 일반화해 배제하거나 잘못된 확증편향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최근 한 래퍼가 FP 유형을 놓고 ‘X프피’라고 비하한 것이 대표적인 부작용 사례다. 한 기업의 인사팀장은 “채용에 MBTI 도입 논의가 나와 인사팀을 대상으로 조사해봤더니 팀 플레이가 힘들다는 I 유형과 게으르다는 P 유형이 절반을 훌쩍 넘은 걸 보면 팀원 대부분이 면접도 못보고 탈락했을 것”이라며 “MBTI는 업무 능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 MBTI 연구소 김재형 연구부장은 “MBTI의 본래 취지가 16개의 다양한 성격 유형이 공존하며 서로를 보완하자는 것”이라며 “마이어스 브릭스 재단에서도 ‘채용 과정에서 선별 목적으로 MBTI를 요구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며 위법의 소지가 있다’고 규정한다”고 말했다.

또 성격 검사라는 수단 자체에 과도하게 몰입해서 자아탐구라는 목적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송지미씨는 “최근 절교한 친구와 동일한 MBTI를 가진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멀리하게 되더라”며 “타인을 이해하는 하나의 지표일 뿐인데, 지나치게 몰입해 타인을 낙인찍고 판단하는 무례한 도구로 변질되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심서희씨도 “인간관계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사용한 MBTI가 오히려 시야를 닫아버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곽금주 교수는 “MBTI 등 성격유형 검사에 과의존, 맹신하게 되면 지나치게 주변 환경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박선웅 교수도 “자기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MBTI는 긍정적이지만, 이런 관심을 MBTI로만 해결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며 “다양한 직무 체험이나 교육 등 실질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의 관심사를 찾고, 인생을 설계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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