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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규제개혁과 역동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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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20세기는 한반도에 격변의 시기였다. 망국, 식민지배, 해방, 독립, 참담한 동족상쟁이란 민족적 비극을 겪고 그 위에 피어 오른 눈부신 경제발전과 국가위상 제고… 한 세기에 걸쳐 펼쳐진 이 대 파노라마의 전개는 ‘격동’ ‘기적’이란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러한 파노라마를 전개하게 된 20세기 한반도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필자의 소견으로는 ‘신분계급의 완전 붕괴’였다.

한반도는 수천 년에 걸쳐 계급사회였다. 태생에 의해 계급이 정해졌으며 이 것이 때로는 다소 유연하게 때로는 경직적으로 작동했지만 이 땅에 살아온 대부분 민초들에게는 좌절과 자포를 낳고 가슴에 한(恨)의 응어리가 맺히게 한 제도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소망을 이룰 수 없을 때 좌절에 빠지고 그 멍에가 자식들에게까지 씌어지면 한을 쌓게 된다.

경제발전의 최대동력은 역동성
규제개혁 자체보다 내용이 중요
역동성 강화하는 규제개혁 돼야
정밀분석 토대 위에 추진 바람직

갑오경장(1894)에 의해 노비제가 철폐되었으나 계급제도는 조선이 망하기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법적으로 신분계급제도가 철폐된 것은 일제가 조선민사령(1912)을 도입하면서였다. 이후 모든 집안은 족보를 만들어 가졌고 제사를 지내면서 양반 가문의 자손들이 되었다. 일제는 또한 1911~18년 지적조사를 거쳐 토지등록제도를 도입했다. 이 과정에서 지방의 지리 사정에 밝은 아전계급이 신흥지주로 부상하고 주인이 분명치 않은 토지는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과거 양반들은 토지의 지주로서, 과거 상민과 노비들은 소작농으로 실질적 계급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해방 후 토지개혁(1950)이 실시되면서 토지소유로 남아있던 계급구별이 와해되었다. 한국전쟁 3년은 그나마 과거 양반들이 지키려 했던 체통의 유산마저 모두 지워버렸다. 피난지에서 굶주림을 피하려 온갖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과거 무슨 출신이라는 유산이 모두 무색하게 되었다.

전쟁의 포연이 가신 1950년대 중반의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가 똑같은 출발선에 서게 되었다. 공산혁명을 제외하고 일찍이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급격한 신분계급 완전 붕괴가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과거 양반 자식들에게만 국한되었던 교육과 과거시험의 기회가, 일제 때 조선인들에게 제한되었던 입신출세의 기회가 이제 모든 국민들에게 열리게 되었다.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고 서울의 명문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논밭에서, 공장에서, 시장에서 한국 부모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게 되었으며 자식들 또한 고시와 대기업 입사를 통해, 중동의 열사에서, 해외건설 현장과 수출전선에서 자신의 성취와 부모의 한을 풀어드리러 밤낮없이 뛰게 되었다. 종래 국민 10%에게 제한되었던 부와 출세, 재능 발휘의 기회가 국민 100%에게 열리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폭발적으로 솟아오른 엄청난 국민적 에너지가 전후 한미동맹, 세계교역 환경, 국가지도자들의 바른 방향 설정, 관료들의 실행력, 기업인들의 불굴의 의지 등과 만나며 한국경제 기적을 이룬 원동력이 되었다고 필자는 이해하고 있다.

유럽의 계급사회와 달리 출생과 배경에 상관없이 부와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시민에게 제공한 미국은 유럽보다 월등한 역동성을 가지며 오늘날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20세기 중반 대한민국에 형성된 사회적 환경은 피부 색깔에 의한 제약은 없애지 못한 아메리칸 드림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코리안 드림’을 제공했다. 그 위에 분출한 민초들의 힘이 조선, 자동차, 반도체, K-pop 등 세계적 성공을 낳게 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땅에는 다시 부의 격차가 고착화되고 신계급 질서가 자리잡고 있다. 역동성은 줄어들고 흙수저, 금수저 얘기가 나왔다. 지금 우리 세대가 차세대를 위해 지키고 물려주어야 할 가장 소중한 자산은 역동성이 꺼지지 않는 사회환경이다.

윤석열 정부는 규제개혁을 경제정책방향의 핵심 주제로 택했다. 역대 거의 모든 정부에서 이를 기치로 내걸고 추진해왔으나 부진한 면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다시 강조한 것은 잘한 일이다. 시대와 환경이 변함에 따라 규제혁신을 상시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어떤 규제개혁을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과거 규제개혁 드라이브가 규제완화 자체를 강조하면서 종국적으로는 목소리 크고 로비력 강한 집단의 기득권을 강화해 주는 방향으로 포획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규제개혁의 핵심적 목표는 공정하면서 역동성 있는 시장 생태계를 마련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시장 자유와 규제완화만이 늘 최선의 답은 아니다. 그 것은 때로 기득권을 더 강하게 해주고 승자독식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친기업’과 ‘친시장’이 같은 것도 아니다. 기존 대기업을 위한 규제완화는 시장참여자의 편익과 미래 기업들의 공간을 축소시키기도 한다. 친기업이 때로는 반시장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좋은 규제개혁은 규제의 궁극적 수혜자와 피해자가 누군지, 장기적 편익과 비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조사분석 위에 이뤄질 때 가능하다. 이번 정부에서는 실적 위주가 아닌 정밀 조사분석을 토대로 규제개혁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