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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윤 대통령의 로프 없는 번지점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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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논설위원

고정애 논설위원

“당신들 로프 없이 번지점프를 하고 있군.”
빌 클린턴 대통령의 참모였던 조지 스테퍼노펄러스에게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였던 토니 스노가 외쳤다는 말이다.(『너무나 인간적인』)

윤 대통령, 도어스테핑 홀로 대비 #대통령 발언은 정교·전략적이어야 #참모진 조력 받아서 혼선 줄이길

전후 사정은 이랬다. 1993년 어느 날 오후 9시 클린턴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세금 관련 연설을 했다. 직전까지 첨삭해 연설문을 프롬프터에 끼워 넣은 건 8시48분이었다. 대통령이 급하게 혼자 연습했다. 스테퍼노펄러스는 직후 역대 대통령들의 연설문 담당자들의 모임(저드슨웰리버 소사이어티)에 갔다. 그가 상황을 설명하자 다들 못 믿겠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었다고 한다. 그러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팻 뷰캐넌이 입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 자네 말은… 대통령이 9시10분 전까지 한 번도 연습하지 않았다는 건가?” 여기저기서 수군댔다. 그러다 나온 외침이 ‘로프 없는 번지점프’였다.

이들의 표현법을 빌리면 윤석열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약식 기자회견)은 훨씬 더 높은 곳에서 로프 없이 번지점프를 하는 격이다. 클린턴은 보고 읽은 거지만 윤 대통령은 즉흥 문답이어서다. 그것도 매주 두세 차례나.

많은 이들이 궁금할 것이다. 고도로 정교하고 전략적이어야 할 대통령 발언이니 예상 질문과 답변(Q&A)을 통해 대비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대통령 처음 해봐서”라든가, “법조인이 폭넓게 정·관계에 진출하는 게 법치국가” “전 정권에서 지명된 장관 중에 그렇게 훌륭한 사람 봤느냐” 등등 상상 외의 답변을 마주하니 누구나 가질 법한 의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출근길 도어스테핑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출근길 도어스테핑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대통령실에 따르면 Q&A가 없는 건 아니다. 처음엔 대변인실 중심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이 그걸 따르지 않았다. 나중에 질문만 달라고 했다. 대통령 스스로 아침마다 청와대 참모와 장관들에게 직접 물어서 답하곤 했다. 그러다 논란이 일자 다른 팀이 투입됐다고 한다. 이번에도 대통령은 며칠 지나지 않아 질문만 달라고 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의 준비 과정이 얼마나 독특한지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의 ‘총리 질문(PMQ·Prime Minister's Questions)’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PMQ는 총리가 매주 수요일 낮 12시부터 30분간 의회에서 야당 당수를 포함한 의원들과 하는 문답으로 능변의 캐머런도 “무섭다”고 했던 제도다. 그는 이렇게 대비했다.

“월요일엔 참모들과 개괄적인 대화를 나눈다. 화요일엔 정책 참모(관료 포함)들과 예닐곱 개 핵심 주제를 포함, 현안에 대해 논의한다. 저녁때 두툼한 관련 서류철이 도착하면 이를 보며 잠자리에 든다. 수요일 아침 회의 후 주요 장관들·PMQ팀과 토의한다. 이때 재치 있는 표현들을 추가한다. 의회엔 오전 10시30분에 도착, 혼자 다시 서류를 정리한다. 가위와 칼, 테이프로 오려 붙이기도 한다. 11시30분 PMQ팀과 최종 실전 연습을 한다.”(『For the Record』)

반면에 윤석열 정부의 상징과도 같은 도어스테핑을 윤 대통령이 혼자 준비한다? 이해 불가다. 자신감이라고? 만용이다. 윤 대통령은 정치적 수사에 능숙하지도 않다. 다변일지언정,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는 달변은 아니다. 최근 논란이 된 발언들을 두고도 참모들이 “진의는 달랐다”고 주장한다. 고용노동부의 주 52시간제 발표와 관련, “정부 방침 아니다”고 한 건 야당과 진보 진영이 공격 소재로 삼은 “주 92시간까지 일할 수 있다”는 부분이라고 한다. “여론조사 의미 없다”도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하다 튀어나온 말이라고 한다. 유사한 지적이 정치 입문 시절부터 있었는데도 안 달라진 걸 보면 윤 대통령의 고집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실 윤석열 정부의 방향성 자체는 나쁜 편이 아니다. 한·미 동맹 중시 등 외교안보 스탠스는 안정적이고, 재정건전성 강조나 연금·교육·노동개혁 포부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말이 불필요한 혼란과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윤 대통령이 마음을 고쳐먹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