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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탈원전 정치가 전기료 인상 압력 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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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주헌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전 에너지경제연구원 원장

박주헌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전 에너지경제연구원 원장

결국 전기요금이 5원 인상됐다. 문재인 정부가 대선을 앞두고 한 차례 연기했고 윤석열 정부도 이례적으로 발표 시점까지 연기해 가면서 내린 결정이다. 집권 초부터 외환위기 이후 최대 물가상승의 파고에 직면한 정부의 고심이 엿보인다.

하지만 1분기에만 7조8000억원의 적자를 낼 정도로 한계에 봉착한 한국전력(한전)의 부실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에 그쳤다. 앞으로 전기요금 인상은 집권 기간 내내 계속 이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문 정부가 억지로 꾹꾹 누르며 미루기만 했던 전기요금의 왜곡이 워낙 심각해 한 번에 해결하기는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문 정부, 억지로 시장가격 억눌러
윤 정부는 원가 존중한 정책 펴야

한전 적자 원인은 간단하다. 발전원가 증가분을 제때 전기 가격에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가주의에 충실하지 않은 가격체계가 원인이란 말이다. 발전원가 상승 원인은 전원(電源) 믹스(Mix) 변화와 같은 내부 요인과 국제 연료 가격 상승 같은 외부 요인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대표적 내부 요인이다. 탈원전 정책은 탄소중립 추세와 결합하며 전원 구성을 원전과 석탄 중심에서 상대적으로 값비싼 재생에너지와 LNG 비중을 높이는 에너지 전환으로 구체화했다. 이로 인해 발전원가 상승을 초래했다.

여기에 외부 요인으로 지난해 말 유럽의 예상 밖 풍력발전 감소로 시작한 에너지 가격 폭등이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겹치면서 세계적 에너지 수급체계 붕괴 우려를 키웠다. 이런 추세가 꺾일 줄 모르며 발전원가 폭등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대내외적 상황 변화로 전기가격 인상은 불가피했는데도 전기가격은 한동안 요지부동이었다. 문 정부 시절부터 전기가격을 철저히 정치적 목적으로 통제해왔기 때문이다. 한전 적자가 매일매일 쌓여 가는데도 가격이 움직이지 않은 시장 기능부전 상태가 이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계속됐다.

전기가격을 그토록 억눌러야 할 정치적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정치로 왜곡된 탈원전 정책이 아닌가 싶다. 사실 탈원전을 정책 목표로 내세우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물론 탈원전에 따른 비용과 편익을 소상히 밝혀 국민적 합의를 얻어야 함은 필수조건이다.

그렇지만 문 정부는 전기요금 인상을 포함해 한국경제가 짊어져야 하는 탈원전 비용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애초부터 탈원전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것 같다. 오히려 전기요금 인상이 탈원전 비판 여론을 불러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그 와중에 전기요금은 정치화된 탈원전을 맹목적으로 지키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더욱이 선거를 앞두고 표 계산까지 겹치자 전기요금 인상 요인을 따질 여유도 없어 보였다. 그렇지 않고는 국내 사정과 무관하게 2021년 이후 세계적으로 연료 가격이 폭등함에 따라 전기 도매가격이 두 배 이상 올랐는데도 소매가격을 계속 동결한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 최악의 한전 적자는 비겁과 기만을 서민 가계 보호라는 허울로 가린 정치적 전기요금 동결의 결과물이다.

새 정부는 정직해야 한다. 혹시라도 이번에는 거꾸로 원전 확대의 정당성에 매몰돼 전기가격을 또다시 정치적으로 결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최근 가구당 연간 지출액을 100만원 이상 증가시키는 휘발유 가격 인상에 대한 불평은 상대적으로 작지만, 가구당 연간 요금 증가가 2만원 내외로 예상되는 전기가격 인상에 대한 불평의 소리가 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휘발유 가격은 시장에서 결정되지만, 전기 가격은 정부가 정하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다. 전기가격은 오롯이 원가주의에 따라 운영되는 시장에서 결정해야 한다.

문제는 가격 결정 체계가 여전히 정치적 입김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원가주의의 실현은 전기가격 결정기구의 실질적 독립에서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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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헌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전 에너지경제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