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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의 발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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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한슬 약사·작가

박한슬 약사·작가

17세기 일본 인구는 조선의 두 배인 3000만 명 정도였다. 조선이 임진왜란 초기에 패퇴한 원인이 여럿이지만, 양국 간 체급 차를 빼면 바른 해석이라 보기 힘든 이유다. 더 놀라운 건 일본 인구가 19세기까지 거의 일정하게 유지됐다는 점이다. 주요 원인은 당시 횡행하던 마비키(間引き)라는 악습이다. 가족 머릿수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인두세(人頭稅) 방식의 징세를 피하려 부모가 갓 태어난 영아를 지속해서 살해한 탓에, 인구가 200년 넘게 큰 변동 없이 일정 수준으로 유지된 것이다.

이런 사정이 변한 건 일본이 근대국가로 변모하면서다. 노동집약적 공업에 투입할 노동자가 대량으로 필요해진 까닭에, 영아 살해를 중범죄로 취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목적으로 일본 정부는 낙태도 범죄로 의율(擬律)하기 시작했다. 이런 형법 체계가 식민지 조선에 그대로 이어졌고, 해방 이후에도 한국전쟁을 겪으며 발생한 인구 감소를 벌충할 목적으로 계속 존치됐다. 윤리적 정당성을 떠나 애초에 인구정책을 위해 발명된 죄였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여기에 현상 변경을 시도했던 게 박정희 정권이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경제성장률 둔화를 막기 위해서 피임 권장은 물론이고 낙태를 합법화하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해 인구 증가를 적극적으로 억제했다. 명목상의 제약만 남겨두고 낙태가 폭넓게 허용된 셈이다. 이런 정책의 효과는 강력했는데, 1970년 합계 출산율은 4.5명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이 끝난 1989년엔 1.56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목표치보다 지나치게 출산율이 낮아진 것이다. 그러자 2005년 ‘저출산·고령사회 기본법’이 제정됐고, 같은 해 처음으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가 시행됐다. 그간 사문화되었던 낙태죄가 다시금 인구 증가라는 정책 목표를 위해 부활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 사례를 분석하면, 이런 접근은 엉터리에 가깝다. 일본에서 ‘마비키’라는 악습이 사라지게 된 건, 영아 살해에 대한 강력한 단속과 금지 때문이 아니라 농업생산력 증대로 과거보다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박정희 정권에서의 낙태 허용이 효과를 낸 건, 당시 피임률이 극도로 낮았기 때문이다. 관련 조사가 시작된 1976년의 피임실천율은 44.2%에 불과해서, 낙태 외에는 원치 않는 아이를 낳지 않을 방법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피임실천율이 80%를 넘는 요즈음에는 낙태가 유의미한 출산율 영향 요인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저출산 대책은 재정적 부담을 최대한 지지 않는 방식의 인식 개선 사업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엔 미국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낙태죄 재입법이 이슈화하고 있는데, 법적 처벌이 분윳값을 내어주진 않는다. ‘제값’ 치르는 제대로 된 저출산 대책을 기대하긴 무리일까.

박한슬 약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