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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유홍준의 문화의 창

프란츠 파농과 미야타 마리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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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1974년,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된 민청학련 사건은 유신헌법 철폐를 부르짖은 전국의 민주청년 대학생들과 함께 김지하 시인,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윤보선 대통령, 김찬국·김동길 교수와 속칭 인혁당재건위 인사 등 200 여명이 구속된 반독재 민주화운동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정원)는 관련자들이 공산주의자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였으나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자 민청학련은 인혁당 재건위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몰아 이들 중 8명을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하룻만에 사형을 집행하는 엄청난 국가 폭력을 자행하였다.

이때 학생들이 ‘불온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물증으로 내세운 것 중 하나는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쿠바의 소리』와 김준보의 『농업경제학서설』을 통해 의식화되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김준보의 『농업경제학서설』은 우리 농촌의 구조적 모순과 농민들이 얼마나 희생되고 있는가를 논리 정연하게 말해주고 있다.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는 쿠바 혁명의 소리를 들려준 것인데, 제3세계 민족의 문제를 다룬 책으로 더 큰 영향을 준 것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알제리 독립운동의 프란츠 파농
김지하 구명운동의 미야타 마리에
세계 지성들의 석방 서명 받아내
김지하는 우리 현대사의 큰 자산

필자가 김지하 난을 그려 선물한 부채를 펴보는 미야타 마리에 여사.

필자가 김지하 난을 그려 선물한 부채를 펴보는 미야타 마리에 여사.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는 알제리에, 비록 그에게 흑인의 피가 흐르고 본토가 아니라 서인도제도의 프랑스령인 마르티니크 섬에서 태어났지만 당당한 프랑스 정신과 의사였던 프란츠 파농이 앞장서서 그 진실과 당위를 설파해 나아간 것에 대한 감동이었다.

그런데 우리 현대사에도 라이트 밀즈와 프란츠 파농 같은 구원의 손길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1970년 김지하 시인이 『오적』을 발표하자 이를 일본어로 출간하고, 1974년 김지하 시인이 사형선고를 받자 전 세계의 지성들에게 구명운동을 호소한 미야타 마리에(宮田毬栄) 여사이다.

미야타 여사는 당시 ‘중앙공론(中央公論)’ 편집장으로 김지하의 작품을 세계에 알리는데 앞장서고 오에 겐자부로 등과 함께 구명운동에 나서서 사르트르, 보브와르, 마르쿠제, 촘스키, 라이샤워 등 세계적 지성의 연명을 받아냈다. 이것이 김지하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형집행정지로 풀려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음과 동시에 세계가 갖고 있던 후진국 한국의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는 계기로 되었다.

1970년이라는 시점을 두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세계적 시각에서 보자면 식민지에서 벗어나자 나라가 두 동강나고 끝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딱한 민족으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독재정권의 치하에서 민중들의 자유와 민주가 짓밟히며, 1인당 국민소득이 불과 250달러에 지나지 않고,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며 노동조건 개선을 호소하는 불쌍한 나라였다. 비유하자면 아프리카 비아프라나 우간다처럼 측은지심이 일어나는 후진국이었다. 그런데 저항시인 김지하의 등장으로 대한민국엔 지성이 살아 있음을 세계인들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미야타 여사는 1980년 김지하가 석방된 이후 1982년에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대설 남(南)』을 발표하였으나 곧 발매금지 되자 이듬해에 잡지 ‘우미(海)’에 게재하였다. 또 ‘모로 누운 돌부처’를 중앙공론에 소개하고 서로 오가며 누님 동생처럼 교류하였다.

그리고 1991년 김지하가 ‘젊은 벗들이여,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속칭,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를 발표하고 난 지 10년이 지난 2000년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걱정이 되어 편지를 보냈더니 다음과 같은 답신이 왔다고 한다.

‘우주의 끝까지 흰 그늘을 안고 가는 것이 우리 두 사람의 운명인 것 같습니다. 나는 4,5개월 입원요양하고 며칠 전 집으로 돌아와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시인 김지하, 미학자로 복귀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겠습니다.’

올해로 86세가 된 미야타 여사가 지난 6월 25일 김지하 49재에 열린 ‘김지하 문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다. 마리에 여사는 추도사에서 김지하와 함께 해온  그간의 모든 일들을 회상하면서 2013년 김지하 시인이 박근혜를 지지한 행동에 대해서 ‘실망하고 우려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 바 있는데 그것이 원수까지 끌어안는 김지하의 생명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그냥 ‘상냥한 누나’로서 시인의 모든 행위를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미야타 여사가 지금 김지하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은 그간 한국 사회에서 독재와 맞선 저항시인 김지하가 잊혀져 가는 것 같은 분위기라며 추도사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맺었다.

“(김지하 시인은) 잊혀 져도 좋을 정도의 옛날 분은 아닐 것입니다. 때때로 김지하 시인과의 악수를 기억합니다. 너무 강한 악수, 그 때마다 시인의 타고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모로 누운 돌부처’에서 회상되는 소년의, 누구에게서도 구할 수 없는 고독과 겹쳐서 나에게 보입니다. 잊어버리기 쉬운 사람들을 위해, 내가 알고 있는 김지하 시인의 상(像)을 지금이라도 쓰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