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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퍼스펙티브

‘마음 속 용’ 못 잡으면 인플레이션은 일상이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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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치솟는 물가 잡을 수 있나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3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앞두고 한국은행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6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6%(전년 대비)에 달했다. 외환위기 와중이었던 1998년 11월(6.8%) 이후 가장 높다. 7, 8월은 더 높을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이 때문에 한은이 이번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0.5%포인트 인상하는 ‘빅 스텝’을 밟을 것이란 관측이 짙어지고 있다. 한은이 걸어가 본 적 없는 길이다.

그러나 곤두박질치는 소비심리와 경제 둔화 우려, 가계 부채 충격이 부담이다. 6월 소비자심리지수(CSI)는 전달보다 6.2포인트나 떨어져 96.4에 그쳤다. 기업경기실사지수 등 체감경기를 나타내는 지표도 일제히 떨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금융가 한편에서는 ‘빅 스텝’ 대신 ‘베이비 스텝’(0.25%포인트 인상)에 그칠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찮다.

소비자물가 환란 이후 최대 상승
기준금리 인상폭 놓고 한은 고민

“인플레 심리 못 잡으면 고질 된다”
연준, 경기 희생 각오한 금리인상

정부 미시적 물가 대책으론 한계
BIS “신속하고 단호한 행동 필요”

인플레이션은 경기를 인질로 삼는 악당이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통화 긴축(금리 인상)이 필요하지만, 총을 함부로 쏘면 인질로 잡힌 경기가 다칠 수 있다. 게다가 금리 결정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금방 확인되지 않는다. 통상 6개월은 지나야 정확한 효과를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금리 정책은 일정 정도 모험과 결단의 영역이다. 통화 정책을 둘러싼 중앙은행의 결정이 늘 고민스러운 이유다.

‘인플레 파이터’ 선언한 파월

퍼스펙티브

퍼스펙티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5월 빅 스텝(0.5%포인트 인상)에 이어 6월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인상)을 단행했다. 7월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서 또 한 번의 자이언트 스텝 가능성도 점쳐진다. 3월 0.25% 인상 이후 이어지는 공격적 행보다. 물가인상 우려가 대두하던 지난해 초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인플레는 일시적”이라며 유보적 태도를 보였던 것과 180도 달라졌다.

과격하리만큼 대담한 연준의 금리 인상에는 인플레이션 심리를 초장에 잡겠다는 판단이 깔렸다. 파월 의장은 얼마 전 열린 유럽중앙은행(ECB) 포럼에서 “우리가 너무 나가서 위험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더 큰 실수는 물가 안정성 회복에 실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월은 “경기후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했지만 ‘립 서비스’에 가깝다. “연착륙이 도전적인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직설적 화법을 피하는 연준 의장의 언어 습관을 고려하면 의미는 명확하다. 40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인플레이션에 맞서기 위해 경기후퇴 위험까지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의도 증권가의 한 분석가는 파월의 의지를 ‘브로큰 애로우(Broken Arrow, 부서진 화살)’라는 군사 용어에 비유했다. 진내(陣內) 포격이라는 뜻이다. 미국 경제에 들어온 적군(물가)을 잡기 위해 아군(경기)의 피해를 무릅쓰고 무차별 폭격(금리 인상)을 감행하겠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상황은 다급하다.

기대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

치솟는 소비자물가

치솟는 소비자물가

파월 의장이 두려워하는 것은 기대 인플레이션이다. 지난 4월 한 콘퍼런스에서 파월 의장은 1980년대 초 공격적 통화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은 폴 볼커 전 의장을 극찬한 적이 있다. 파월에 따르면 볼커는 두 마리 괴물을 동시에 죽였다. “볼커는 인플레이션이라는 용을 죽였고, (동시에) ‘인플레이션은 불변하는 삶의 진실’이라는 대중의 믿음도 깼다.”

이 중 의미심장한 것은 후자다. 인플레이션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대중의 생각을 바꿨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장기화하면 경제 주체들은 물가 상승을 당연시하고 이에 맞춰 의사 결정을 한다. 사재기 현상이 벌어져 인플레이션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실질 임금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들이 높은 임금 인상률을 요구하면서 임금이 다시 물가를 자극하는 ‘임금-인플레 소용돌이(spiral)’에 빠질 위험도 있다.

경제는 심리다. 종종 ‘자기실현’으로 이어진다. 어떤 면에서는 기대 인플레이션은 실제 인플레이션보다 더 무섭다. 과감한 조치로 ‘마음속의 용’을 제압한 선배 의장 볼커를 파월은 높이 평가했다. 자신도 공격적인 통화 정책으로 ‘기대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잡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기준금리 20%대까지 올린 볼커

미국의 1970년대를 지배했던 ‘대 인플레이션’(The Great Inflation) 상황을 살펴보자. 전후 미국 경제는 유례없는 호황 속에서도 물가 걱정은 크지 않았다. 전장에서 돌아온 노동력이 풍부했고, 기술 발달로 생산성도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적절한 금리 정책으로 연준의 독립성을 지켰던 윌리엄 마틴(1951~70년 재임)의 역할도 컸다. 그는 “중앙은행의 역할은 파티가 한창일 때 그릇을 치우는 일”이라는 명언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후임자 아서 번즈(1970~78년)는 자신을 임명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재선 승리를 위해 ‘쉬운 통화 정책’으로 일관했다. 급격한 금리 인상을 회피했다. 이런 태도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 닉슨의 금 태환 정지 조치 등과 겹치며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아서 번즈 이후 잠깐 연준을 이끌었던 윌리엄 밀러(1978~79년)도 물가보다 경기 침체를 걱정하며 금리 인상을 주저했다. 미국은 1970년대 말과 80년대 초 매년 10%가 넘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을 일거에 진압한 인물이 폴 볼커 의장(1979~87년)이다. 그는 취임 2개월 만인 1979년 10월, 기준금리를 11.5%에서 15.5%까지 한꺼번에 올렸다.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 불릴 만큼 충격적 조치였다. 볼커는 재임 중 기준금리를 최대 20%대까지 올리는 등 ‘인플레 파이터’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통화 긴축이 투자 및 소비의 단기 위축을 가져오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 구조 조정과 이익 증대를 가져오리라 봤다.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긴 했지만, 결국 물가가 가라앉으면서 연준에 대한 경제 주체들의 신뢰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미국이 선제적 통화 정책으로 2001년 IT 버블 붕괴, 2008년 금융위기 등을 넘긴 것도 볼커가 놓았던 물가 안정 초석이 굳건했기 때문이다.

논란 부른 대기업 임금 자제론

한은의 6월 소비자 동향조사에서 기대 인플레이션율은 3.9%로 5월보다 0.6%포인트나 올랐다. 10년 2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기업들의 임금 인상 자제를 요청한 것도 기대 인플레이션 고착화에 대한 위기감에서 비롯됐다.

‘대기업발 임금-인플레 악순환’에 대한 우려는 일리가 없지 않다. 300명 이상 대기업의 1분기 임금은 전년 동기 대비 13.2%나 증가했다. 올해 삼성전자·네이버·카카오 등은 물가상승률을 훌쩍 웃도는 10% 내외의 임금인상을 결정했다. 해마다 커지는 대기업/정규직-중소기업/비정규직 임금 격차가 사회 갈등 요인이 될 가능성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대기업의 높은 임금 인상에는 첨단 기술 기업의 인력 확보 목적, 팬데믹 기간 동안 억제된 보상에 대한 만회 심리 등이 작용했다. 게다가 정부가 민간 기업의 임금 결정에 개입하는 듯한 발언은 시대착오적이다. 추 부총리의 발언은 실질 임금 감소를 걱정하는 노동계의 반발만 샀다.

정부는 탄력세인 유류 세율을 법정 한도(지난해 11월 인하 전 대비 37%)까지 낮췄다. 어떻게든 물가 인상 확산을 차단하려는 안간힘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느끼는 소비자 체감은 크지 않다. 유류세 인하분만 하더라도 주유소와 정유사 좋은 일만 시킨다는 의심이 일고 있다. 정부의 개별적인 노력은 인플레이션의 큰 파도 속에서 임시방편이라는 느낌을 준다. 결국 ‘인플레 종결자’로서의 중앙은행의 역할에 눈이 쏠릴 수밖에 없다.

‘신속하고 단호한 행동’ 주문한 BIS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달 낸 연차보고서에서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 고착화 전에 신속하고 단호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물가 상승이 일상을 지배하게 되면 정상적인 경제생활이 힘들어진다. 투자·고용·소비에서 경제 주체들의 합리적 기대가 모조리 헝클어진다. BIS는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기준금리를 급격하게 인상하지 않으면 세계가 1970년대식의 인플레이션 악순환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1년 동안 부풀려진 인플레이션 압력을 고려하면 수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선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필요하다면 경제성장이 상당히 훼손되는 일마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BIS의 권고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고통은 불가피하다. 물가 억제와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둘 다 잡을 수 없다면 한 곳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왕 겪을 고통이면 ‘가늘고 길게’보다 ‘굵고 짧게’가 나을 수 있다. BIS의 충고대로 ‘통화 정책의 중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