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한·일 관계, 피해자·가해자 공감대부터 쌓아가야

중앙일보

입력 2022.07.07 00:32

업데이트 2022.07.07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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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역사 문제, 명분과 실리 사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원자탄인가, 소련군의 참전인가?

8월 15일이 다가오고 있다. 오래된 논쟁 가운데 하나가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낸 가장 중요한 원인을 찾는 것이다. 미국의 원자탄 사용이 본토 결전과 일억특공(一億特攻)을 주장하던 일본의 항복을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고, 전범들에게 가혹했고 수탈의 피해가 컸던 소련군의 참전이 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1965년 한·일협정 실리 챙겼으나 징용·위안부 보상 갈등 남겨
1945년 이전 협정은 ‘이미 무효’ 문장 놓고 양국간 해석 대립
실리 위해 명분 포기하면 다시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 커
역사는 되돌릴 수 없어 … 서로 충분한 시간 갖고 솔직해져야

둘 중 어떤 요소가 일본 항복의 더 중요한 원인인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일왕의 항복 방송을 보면 원자탄이 중요한 명분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의 전범재판에서 핵무기 사용이 중요한 논란이 됐다는 점이다. 1946년 도쿄에서 열린 전범재판은 누가 보아도 정당한 것이었음에도 말이다.

일본은 전쟁을 먼저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해야 하는 명분도 없었다. 일본 정부는 미국의 석유를 비롯한 자원 금수조치에 대항한 자위적 조치였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무리한 확장을 하지 않았다면, 자원 부족에 시달릴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일본의 세력 팽창 과정에서 수많은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승전 명분을 잃은 연합국

역사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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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예상과 달리 전범재판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전범재판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반(反)평화 범죄, 반인도주의 범죄, 그리고 관습적 전쟁 범죄였다. 그런데 이 세 개의 이슈가 모두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첫 번째 문제는 평화에 반하여 침략을 일으킨 일 자체를 범죄로 규정한 선례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전범들의 변호인 측에서는 승전국 입장에서 패전국에 대해 침략죄를 적용할 뿐이라는 입장을 내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반인도주의의 문제는 비단 독일과 일본만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식민지를 운영했던 연합국에도 모두 관련되는 이슈였다. 연합국도 식민지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침략과 반인도주의 범죄에 관여됐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전쟁 과정에서 있었던 전략 폭격의 문제였다. 전선에서 이루어지는 전술폭격과 달리 전략폭격은 민간인 거주지역에도 무차별 폭격을 가함으로써 상대방 국가의 전쟁 의지를 꺾어놓는다는 목적이 있었다. 독일의 함부르크와 드레스덴, 일본의 도쿄에 대한 전략폭격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으며, 원자탄의 투하도 전략폭격의 일환이었다.

전략폭격은 상대방 국가의 산업시설을 마비시킴으로써 전쟁에 동원되는 산업물자의 고리를 끊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산업시설 주변에는 수많은 근로자가 주거시설과 상업지대가 있었기 때문에 전략폭격은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는 전선에 있는 자국 젊은이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전략폭격이나 원자탄의 사용이 합리화됐다. 적대국의 전쟁 의지를 꺾어 빨리 전쟁을 끝내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진주만을 비롯해 큰 피해를 본 연합국의 입장에서는 전범국에 대한 보복이라는 점에서 큰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발생한 민간인의 피해로 인해 오히려 전범의 변호인들은 일본군의 반인도주의적 범죄와 전략 폭격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전략폭격은 전쟁을 끝내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국전쟁 시기 북한과 베트남 전쟁 시기 북베트남은 전략폭격의 가장 큰 피해지역이었지만 전략폭격이 북한이나 북베트남의 항복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일본 역시 소련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빠르게 항복을 했을까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청구권이라는 전대미문의 용어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위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실리와 명분 사이의 갈등은 또 한 번의 시험대에 섰다. 당시 한국 정부는 빠른 경제성장을 위하여 자금과 기술이 필요했다. 일본도 냉전 체제에서 안보상의 문제로 한·일 협력이 필요했다.

한국 정부는 일제강점기 일어난 수탈에 대한 배상금을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일본은 식민지 시기를 통해 한국을 발전시켰고, 패망 직후 미군정이 한국에 있던 일본인들의 개인재산을 몰수했으며, 그 재산이 한국 정부로 이양됐기 때문에 몰수된 일본인들의 개인 재산에 대해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은 1945년 이후 미군정의 모든 정책을 그대로 인정하겠다고 서명을 했음에도 말이다.

한국이 계속 배상금을 요구하자 일본 정부는 처음에 독립축하금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나중에는 청구권이라고 하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을 붙였다. 한국 정부가 청구해서 받았다는 것이다. 청구권 자금 협정 2조에서 양 체약국과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규정했다. 한·일 간의 조약 사이에는 ‘이미’ ‘최종적’ ‘불가역적’과 같은 말장난이 난무하고 있다.

제국주의 폭력보다 돈에 관심

배상 문제에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이해관계가 연계돼 있었다. 일본이 식민지에 배상하게 된다면,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도 배상해야 하는 국제법적 근거가 될 수 있다. 일본보다 더 넓은 지역을 더 오랜 시간 식민지로 갖고 있으면서 많은 수탈이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승전국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만약 식민지에 대한 배상이 이루어진다면, 과거 식민지를 운영했었던 서유럽 국가들은 파산을 면할 수 없었다. 또한 식민지에서 가져온 문화재를 돌려준다면, 유럽의 세계적 박물관들은 모두 빈 창고가 될 것이다.

한·일협정에서 역사 문제와 관련된 명분은 1945년 이전 한·일 간의 협정은 ‘이미 무효가 되었다’는 문장 하나로 마무리됐다. 일본 정부는 ‘이미’가 1965년 이전인 1945년 시점에서 무효를 의미하기 때문에 협정들 자체는 합법적이라고 해석한 반면, 한국 정부는 을사늑약과 강제합방조약이 체결 당시부터 무효라고 해석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어떠한 사과나 반성도 받아내지 못했다.

청구권 자금은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지금도 한일 간에는 징용과 위안부에 대한 보상 문제가 갈등의 핵심이 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제국주의 시대 힘의 폭력이 만들어낸 불행이 더 이상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돈의 문제가 되고 있다.

관계 회복하려면 명분이 중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들을 해결할 것인가. 한쪽에서는 비정상적이었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전쟁을 멈추기 위해 전략폭격이 불가피했으며, 민간인들의 피해에 대한 강조는 피해자 코스프레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일본 군국주의를 막기 위해 전쟁을 했다는 연합국도 민간인 학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약육강식의 논리에 기초한 제국주의에 다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는 일본의 비인도주의적인 범죄를 비난하고 이에 대한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미 그 배상은 1965년 한·일협정에서 끝났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진행된 전략폭격과 한·일협정이라는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다. 특히 한·일 간의 관계 회복이 중요한 현 시점에서 명분의 회복은 더더욱 중요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전쟁 상황에서 빠른 종전을 위한 전략적 고려가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한 무고한 피해자들이 발생했던 상황을 무시하거나 환호해서는 안 되며,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한·일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한·일협정은 실리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했지만, 과거사에 대한 양국 사회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직시했어야 했다. 만약 한·일협정에 ‘이미 무효가 되었다’라는 표현 대신 ‘1945년 이전 한·일 간의 협정이 무효가 된 시기에 대해 양국 정부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양국 정부는 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향후 공감대 형성에 사용하기로 했다’라고 솔직하게 담았으면 어땠을까?

현안과 역사 문제는 분리해야

둘째로 현안과 역사적인 문제를 구분해야 한다. 과거사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현안들에 대한 논의가 모두 멈춰서는 안 된다. 박근혜 정부는 한때 역사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일본과 모든 논의를 중단하겠다고 했다가 무리하게 위안부 합의를 하면서 태도를 바꾸었고, 이것이 지금까지 한·일관계 악화에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는데, 여기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급하게 해결하려고 하면 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과거사 문제와 긴급한 현안 논의는 서로 분리돼야 한다. 역사를 정치의 볼모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실리를 위해 명분을 포기한다면, 한·일협정의 경우처럼 이는 다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명분은 실리만큼 중요하며, 실리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명분을 위해서 솔직해져야 한다. 때로는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며, 올바른 명분을 위해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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