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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본세](39) 주역의 경고, "팬덤을 깨라!"

중앙일보

입력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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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아닌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정말 위기다. 물가 폭등은 서민 생활을 위협하고, 금리 인상은 신혼 영끌족의 영혼을 갉는다. 인구 절벽, 연금 고갈은 공포다. 미·중 패권전쟁, 글로벌 공급망 붕괴, 북한 핵실험까지…. 아슬아슬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권력 타령이다. 끼리끼리 모여 진영을 만들고, 쌈질해댄다. 선거가 끝났는데도 저런다. 싸움질만큼 재밌는 건 없다. 한국 정치는 드라마보다, 영화보다 더 리얼하고 극적이다. '선거가 끝나도 책이 안 팔린다.' 출판사 경영하는 친구의 신음이 깊다.

정치는 아예 예능을 닮아간다. 그래서 나타난 현상이 '팬덤(fandom) 정치'다. 합리적 토론, 민주적 절차 다 필요 없다. 열성(fanatic) 지지자들이 정치 자산이다. 정치인는 팬덤에 기대고, 팬덤은 민심을 내편 네편으로 가른다.

구심점이 없다. 총화(總和)가 이뤄지지 않는다. 민심이 갈리니 위기 대응력은 떨어진다. '새 대통령은 다를 줄 알았는데, 역시나….' 옹졸한 리더십에 민심은 하나둘 떠나고, 지지율은 떨어진다.

정치는 예능을 닮아간다. 그래서 나타난 현상이 '팬덤(fandom) 정치'다. 합리적 토론, 민주적 절차 다 필요 없다. 정치인는 팬덤에 기대고, 팬덤은 민심을 내편 네편으로 가른다. '이재명 책임론'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전북 고창 지역구 사무실 출입문에 붙어있는 비난 대자보.

정치는 예능을 닮아간다. 그래서 나타난 현상이 '팬덤(fandom) 정치'다. 합리적 토론, 민주적 절차 다 필요 없다. 정치인는 팬덤에 기대고, 팬덤은 민심을 내편 네편으로 가른다. '이재명 책임론'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전북 고창 지역구 사무실 출입문에 붙어있는 비난 대자보.

위기 속에서도 갈라지는 민심.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주역 59번 째 괘 '풍수환(風水渙)'이 던지는 질문이다.

바람으로 상징되는 손(巽, ☴)과 물로 표현되는 감(坎, ☵)이 위아래로 놓여있다. 바람이 호수 위에 불면, 물결이 인다. 물결은 퍼져나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래서 괘 이름이 '흩어지다', '떠나다'라는 뜻을 가진 '渙(환)'이다. 인플레로 자산 가치가 줄어드는 것도 '渙(환)'이요, 민심이 갈려 흩어지는 것도 '渙(환)'이다.

괘 아래 감(坎, ☵)은 위험을 상징한다. 위기에 빠진 서민들의 삶이 그 속에 담겨있다. 하루가 다른 물가에 주부는 시장 가기가 겁난다. 남편은 오늘 회사에서 또 무슨 일이 터질지 걱정이다. 돈 끌어모아 해외 주식에, 코인에 투자한 청년 직장인은 심장 죄여오는 듯한 위기감을 느낀다. 그러니 맘 둘 곳이 없다.

흩어져 구심점이 없으니 힘없는 사람들은 내편, 니편 끼리끼리 뭉친다(아래에서 첫째, 둘째 괘). 국가 통합이라는 대의가 실종됐으니 팬덤이 기승을 부린다(아래에서 셋째 괘). 열성(fanatic) 지지자들은 5년 후를 바라보고 다시 상대 팬덤을 공격한다. 지금 상황은 '풍수환' 그 자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주역은 리더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전체 괘를 설명하고 있는 괘사(卦辭)는 이렇게 말한다.

王假有廟, 利涉大川.

왕이 묘당에 이르러 제사를 지내니, 큰 강 건너기에 유리하다.

묘당은 조상을 모신 사당이다. 주역의 시대, 묘당은 국가적 통합을 의미하는 곳이다. 정통성의 상징이다. 왕이 그곳에 이르러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정통성을 확인하고, 이데올로기적 통합을 이루기 위함이다. 이런 행동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총화를 끌어낸다. 왕은 종묘 제사로 민심을 모으고, '위기의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대통령 당선자가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이 바로 동작동 국립묘지다. 순국선열에게 국민의 대표 됐음을 보고하고, 민심을 받들어 선정을 펼치겠다고 다짐한다. 선거로 갈라진 민심을 수습하고, 통합을 이뤄나가기 위한 행보다.

주역 59번 째 괘 '풍수환(風水渙)'은 바람으로 상징되는 손(巽)과 물로 표현되는 감(坎)이 위아래로 놓여있다./바이두

주역 59번 째 괘 '풍수환(風水渙)'은 바람으로 상징되는 손(巽)과 물로 표현되는 감(坎)이 위아래로 놓여있다./바이두

주역은 구체적인 민심 통합 방법도 제시한다. 네 번째 효사(爻辭)는 이렇게 적는다.

渙其群, 元吉, 渙有丘, 匪夷所思

무리를 흩트리니 크게 길하다. 작은 무리를 흩트려 더 큰 언덕(무리)을 쌓으니,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네 번째효사는 왕을 주변에서 보좌하는 지도층을 말한다. 주역은 그들에게 '붕당을 해체하라'고 말하고 있다. 팬덤을 깨라는 얘기다. '작은 무리를 깨 더 큰 언덕을 쌓아야 한다'는 건 개인의 이익이 아닌 국가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국민 팬덤'을 만들라는 뜻이다. 그게 대의다. 대의가 살아야 총화가 만들어지고, 위기 대응력이 높아진다.

우리는 지금 그게 안 된다. '노사모', '박사모', '문빠', '개딸'... 정치권에서 팬덤 계보가 돌고 있다. 심지어 요즘은 '건희사랑'이라는 팬덤도 등장했다.

渙其群, 光大也.

무리를 흩트려라. 그러면 광대해질 것이다.

팬덤을 깨라! 그리하여 우리 정치를 광명정대(光明正大)한 광장으로 나오게 하라. 주역의 경고는 너무도 현실적이다.

리더 본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왕의 효'로 통하는 다섯 번째 효사는 이렇다.

渙汗其大號, 渙王居, 舞咎

땀을 흩뿌리듯 명령을 내리고, 왕의 재물을 나눠주니, 허물이 없다.

나라가 중병에 걸렸다. 리더는 곧은 명령으로 병을 고쳐야 한다. 병이 치유될 때 우리 몸은 땀을 배출한다. '땀을 흩뿌리듯 명령을 내린다'라는 건 바로 이런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백성들이 생활고에 신음하고, 민심이 흐트러질 때 왕은 곧은 정책으로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 그게 리더가 할 일이다.

리더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자기의 정치적 자산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팬덤 정치를 뒤엎겠다며 권력에 오른 그가 스스로 팬덤에 기대려 한다면, 팬덤 정치의 폐해는 지속할 뿐이다.

팬덤 정치를 '민주주의의 양념'이라고 옹호했던 전임 대통령은 지금 확성기 시위로 고통받고 있다. 현직 대통령은 '법에 따라 되지 않겠냐'라며 남의 일 얘기하듯 한다. 그러니 이번에는 현직 대통령 사저 앞에서도 확성기 시위가 벌어진다. 팬덤은 증폭된다.

악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시작은 힘 있는 사람이 먼저다. 집권자가 나서야 한다. 한 마을 주민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확성기 시위가 어찌 남의 일인가. 중단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필요하면 현장에 가서라도 그만두라고 얘기해야 한다. 현충원으로 달려가 선열에게 다짐한 게 그것 아니던가.

寬則得衆
관대하면 대중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공자(孔子)는 군자의 5대 덕성을 말하며 그중 하나로 관대함을 꼽았다. 내가 먼저 양보하면 대중의 마음을 얻게 되어 있다. '박근혜, 이명박 시절에 한 일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냐'라는 생각이라면 이 나라에 정치 발전은 없다.

팬덤을 깨라! 그리하여 우리 정치를 광명정대(光明正大)한 광장으로 나오게 하라. 주역의 경고는 너무도 현실적이다. / 바이두

팬덤을 깨라! 그리하여 우리 정치를 광명정대(光明正大)한 광장으로 나오게 하라. 주역의 경고는 너무도 현실적이다. / 바이두

'풍수환' 괘는 물러난 리더의 바람직한 행동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사회 원로급 인사들의 행실을 얘기하는 여섯 번째 효사는 이렇게 말한다.

渙其血, 去逖出, 無咎

피를 피해 멀리 가라. 그래야 허물이 없다.

여섯 번째 효는 원래 음(--)의 자리다. 그런데 양(─)이 왔다. 바로 아래 '군왕의 효'와 강 대 강 부딪치는 형상이다. 그러면서도 여섯 번째 효는 세 번째음효와 결탁하려 한다. 그러니 왕과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러난 원로가 옛 사람들 불러 세력을 과시하려 한다면, 이를 좋아할 왕은 없다.

그래서 '멀리 가라'했다. 잊혀지라 했다. 그래야 허물이 없고,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전임 대통령에 대한 충고의 소리로 들린다.

'풍수환'의 시기,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서민들은 위로부터 불어오는 순풍을 기다리고 있다.

한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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