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양성희의 시시각각

임신할 권리, 중단할 권리

중앙일보

입력 2022.07.06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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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달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를 헌법적 권리로 보장해 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자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50년 가까이 연방 차원에서 보장해 온 낙태권이 흔들리고 주 정부 입법 사안이 되면서, 미국 50개 주 중 절반가량에서 사실상 낙태가 금지되게 됐다. 여성 인권의 명백한 퇴보다. 해외 정상들까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유럽은 물론이고 중국과 베트남,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와 멕시코 등이 다 낙태를 허용한다(미 생식권리센터에 따르면 지난 25년간 50여 개국이 낙태에 대한 접근권을 높이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했다). 미국의 보수 교계는 환영했지만, 격렬한 저항이 일고 있다. “미합중국 아닌 미분열국”(NYT)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이 두 동강 났다.
우리나라는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며 형법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후 3년째 입법 공백이 이어지고 있다. 낙태로 처벌받지 않는 ‘비범죄화’는 이뤄졌지만, 헌재가 대체 입법 시한으로 제시한 2020년 12월 31일을 한참 넘겼다. 정치적 무관심, 무책임의 결과다. 현재 국회 계류 중인 관련 개정안은 6건. 국민의힘은 임신 6주, 혹은 10주까지 허용하는 안, 민주당과 정의당은 낙태죄 전면 폐지, 혹은 24주 이내 허용 안을 냈다.

지난 4일 미국 뉴욕에서 여성들이 연방 대법원의 낙태권 페지 판결에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AFP 연합]

지난 4일 미국 뉴욕에서 여성들이 연방 대법원의 낙태권 페지 판결에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AFP 연합]

 ‘태아의 생명권’이냐,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냐. 양자택일의 문제라 여기기 쉽지만, 여성계는 줄곧 이분법의 폐기를 외쳐왔다. 임신 몇 주부터 태아를 생명으로 보는가에 따라 국가가 허용하는 낙태와 범죄로 나누는데, 상호의존적인 태아와 여성을 대립적ㆍ적대적 관계로 분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임신ㆍ출산은 국가의 통제 대상이 아니라 여성의 건강권ㆍ자기결정권을 아우르는 ‘재생산권(생식권)’이라는 여성 인권의 문제이며, 따라서 국가는 여성이 안전하게 임신ㆍ출산할 권리, 나아가 안전하게 임신ㆍ출산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요지다. 뿌리 깊은 가톨릭 국가들에서도 낙태죄 폐지가 이어지는 근거다.
헌재도 결정문에서 “임신한 여성의 안위가 곧 태아의 안위이며 이들의 이해관계는 일치한다”고 적시했다. 출산 후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는 환경이라면 낙태를 선택하더라도 아이를 위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헌재는 또 “낙태 전후로 적절한 의료서비스와 돌봄이 제공돼야 한다”고 밝혔다. 입법 공백 속 현실은 반대다. 상담이나 정보 제공이 잘 이뤄지지 않고, 수술비는 고액에 천차만별이다. 정보 부족으로 낙태 시기만 늦추거나, 검증되지 않은 약물을 사용하는 위험이 있다. 미성년자나 장애 여성일수록 취약하다.
 미국 상황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는 낙태 이슈에 대한 퇴행적 움직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 등과 맞물려서다. 당장 국내 보수 종교계는 미국의 결정을 환영했다. 여성계는 국회에 입법의 시간이 요구되면서 논의가 ‘임신주수 허용’으로만 좁혀진다면 헌재 결정의 의미가 퇴색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김정혜 박사는 중앙선데이 인터뷰에서 “이미 효력을 상실한 처벌 조항을 다시 만들어 제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제한 여부를 누가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낙태 문제는 여성 본인의 판단을 근거로 의료의 영역으로 넘기면 된다”고 말했다.
 원치 않은 임신의 책임은 남녀 모두에게 있는데 낙태로 인한 육체적ㆍ법적ㆍ도덕적ㆍ사회적 대가는 오로지 여성이 치른다는 점에서, 낙태는 성 평등의 핵심적 주제다. 낙태로 인한 생명 경시가 우려된다면 그 전 단계 피임 교육 강화가 정답이다. 무차별적 낙태 증가를 걱정하기도 하는데, 낙태를 금지한 우리나라 낙태율이 낙태를 허용한 미국ㆍ독일ㆍ벨기에보다 더 높았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8). 출산장려금을 받으려 출산하지 않는 것처럼 낙태죄 때문에 낙태를 안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떻게든 낙태를 하고, 결국 위험해지는 건 여성이다. 낙태를 줄이고 싶으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건 너무 당연한 얘기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후 3년
긴 입법공백은 정치적 무책임
태아와 여성, 상호의존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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