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특허소송,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개혁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이상희 전 대한변리사회 회장

이상희 전 대한변리사회 회장

특허 전쟁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마지막 승부처로 불린다. 특허 전쟁이 벌어지는 소송 무대에서 유럽의 최근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유럽은 올가을 단일 특허제도를 시행하고, 유럽통합특허법원도 개설할 전망이다. 군사공동체(NATO)와 경제공동체(EU)에 이어 거대한 ‘특허공동체’가 탄생하는 셈이다.

사실 유럽은 산업혁명과 특허제도의 발상지다. 영국·독일·프랑스 등은 전통적인 특허 강국이자 유럽의 지식재산(IP) 제도를 대표하는 국가다. 이들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 특허 시장을 선도해 왔다.

미국·유럽·중국·일본 등 제도 정비
변리사에도 소송대리권 허용해야

그러나 한국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이 전 세계 특허 출원 5대 강국으로 발돋움하면서 특허 시장의 무게추가 점차 유럽에서 동북아시아로 이동했다. 유럽의 특허공동체 결성 움직임은 이런 위기의식에서 출발했다.

새롭게 출범하는 통합특허법원은 여러 면에서 특허 분쟁 해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소비자, 즉 국가 경쟁력의 핵심인 기업 중심의 특허 소송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기술 전문가인 변리사의 소송 대리권이다.

유럽통합특허법원 조약 제48조는 적절한 소송 수행 자격을 갖춘 유럽 변리사에게 소송 대리권을 인정하고 있다. 소송 수행 인가증을 획득한 변리사는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통합특허법원에서 단독 대리도 가능하다. 통합특허법원 설치 논의 초기에는 변호사들의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통합특허법원에서 변리사의 소송 대리가 인정된 것은 법률 수요자인 기업들의 요구가 주효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세계적 제약 기업인 로슈가 부도 직전일 때 미국의 벤처기업으로부터 타미플루 특허권을 매입해 돈방석에  앉게 된  사례가 있었다.  노키아·아스트라제네카 등 세계적 기업들로 이뤄진 ‘지식재산 기업 연합’은 “유럽의 미래를 담보하는 기술 중심 중소기업들에 특허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적절한 소송 수행 자격을 갖춘 유럽 변리사(EPA)에게 소송 대리권을 인정하는 것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천명했다. 일본도 변호사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산업계의 요구로 2001년 변리사의 소송 대리권을 허용했다. 2년 넘게 걸렸던 일본의 소송 기간이 절반 수준으로 단축됐다.

세계 특허 출원 4위인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 20여년 전부터 여러 차례 변리사의 특허 소송 대리를 허용하는 법안이 국회 관련 상임위원회를 통과해 법사위원회에 제출됐으나 심의조차 하지 않고 번번이 폐기됐다. 과학기술계와 산업계가 20년 넘게 변리사의 특허 소송 대리를 외쳐왔지만, 변호사 출신 정치인들의 반대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특허 침해 소송은 침해 기술이 특허권 범위에 포함되는지가 핵심인데, 이런 업무는 특허 기술 전문가인 변리사가 특허심판원과 특허법원에서 이미 해오던 업무다. 변리사에게 특허 소송 대리를 허용해도 사법 체계의 근간을 흔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특허 소송은 변호사·변리사가 같이 일하는 대형 로펌이 사실상 독점해왔다.

특허 소송 대리 이슈는 단순히 변호사와 변리사의 직역 다툼이 아니라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한 벤처 기업계의 간절한 요구다. 변호사가 특허 소송대리인으로 선임된 사건에서 당사자가 원하면 변리사를 소송대리인으로 추가할 수 있는 법안이 21대 국회에서 법사위원회 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소형 로펌의 일거리가 늘어나면서 특허 소송 비용도 더 저렴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변리사의 특허 소송 대리는 미국·영국·유럽연합·일본·중국에서 오래전에 허용했다. 법사위원회가  도도한 시대의 흐름을 놓치는 불행한 역사를 이번에는 되풀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상희 전 대한변리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