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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갈라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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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요사이 ‘갈라치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젠더 갈라치기, 세대 갈라치기, 편먹고 갈라치기 등등. 이 말 속에는 이쪽저쪽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이분법적 관점이 들어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이렇게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가운데,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라는 가치평가가 함께 작동하게 될 때다. 단순히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이 옳으면 저것은 틀린 것으로 보는 세상눈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곳곳에 만연한 이분법적 사고는 은근히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 천국과 지옥 또한 여기에 속한다. 독일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재미난 지옥(한국)과 지루한 천국(독일) 중에서 어디를 선택할래?” 지루한 천국에 싫증 난 독일 친구들은 융통성으로 포장된 한국의 역동성에 열광하며 기꺼이 재미난 지옥에 손을 들어 주었다. 반면 한국에 돌아와 이리저리 치이는 느낌을 받았던 나는 원칙을 우선으로 편안함과 안정을 느낄 수 있었던 지루한 천국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좋은 천국과 나쁜 지옥의 이분법에서 던져진 묘한 질문이었다.

젠더·세대 등 편가르기 유행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이분법 아닌
이쪽저쪽 모두의 가치 인정해야

우리가 별생각 없이 누렸던 이분법적 관점에는 막상 듣고 보면 말이 안 되는 것들도 많다. 한 예로 남자와 여자를 보자. 그리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여기에 함께 달아두면, 세상 온갖 것이 이 둘로 나뉘는 일들이 허다하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남녀공학은 드물었고 남학교, 여학교가 대세였다. 각 학교는 교장선생님 재량으로 영어 이외에 또 하나의 외국어(제2외국어)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남학교에서는 독일어를, 여학교에서는 불어를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독일어는 남성적이고 불어는 여성적이라는 이유를 달아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갈라치기 현장이다. 게다가 남학생들은 까까머리에 바지를, 여학생들은 단발머리 (귀밑 2㎝), 혹은 어깨 정도 길이를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치마 교복을 입는 용모 규정도 있었다. 일상에서 여성들이 바지를 즐겨 입는 요즈음에도 화장실 안내표시는 치마와 바지 모양으로 남녀를 가르고 있다.

대학 시절 한 친구는 간혹 자기 부모님의 가벼운 부부싸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분 모두 두터운 믿음을 가진 교인이셨는데, 어머니는 교회에 열심이신 반면 아버지의 신앙생활에서 교회는 그리 열심이지 않으셨다고 했다. 일요일마다 벌어지는 설전에서 어머니는 “당신은 너무 머리로만 믿어서 탈이에요”라고 하시는 반면, 아버지는 “당신은 너무 가슴으로 믿어서 탈이요”라고 반박하셨다는 이야기였다. 머리와 가슴의 믿음은 어떻게 다를까.

뜨거운 열정의 가슴과 냉철한 이성의 머리 또한 이렇게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만들고 있다. 이를 굳이 인간의 언어활동과 관련시키면 “가슴(마음) 속에 담고 있는 말”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될까.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마음도 뇌의 작용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을 말할 때면 손이 자연스레 가슴에 얹혀진다. 이렇게 마음속에 담아둔 말은 때론 여리고 때론 격한 감성으로 가슴앓이에 어울리고,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말은 두 손으로 감싸 안은 딱딱한 뇌와 짝을 이뤄 깊은 고뇌로 간혹 우리를 골(머리) 아프게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왼손잡이를 금기시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왼손잡이 아이들이 정서적 학대를 받으면서,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글을 쓰도록 매를 들어 강제되었다. 지금은 왼손잡이에 대한 그릇된 편견이 사라지고, 오히려 왼손잡이를 두둔하거나 양손잡이가 두뇌 발달에 좋다며 천재적 기질을 발휘하기 위해 양손을 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렇게 너무나 엄격하던 잣대가 힘을 잃고 완전히 다른 가치가 추구되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런저런 갈라치기에 덧붙여 이러쿵저러쿵 옳고 그름을 따지는 행태가, 훗날 터무니없던 시절로 치부되는 그 부끄러움도 알게 될까.

우리의 생각은 깔끔하고 논리 정연한 것을 좋아해서 이분법적 관점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데 익숙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이편저편 쪼개고 나누는 일상에서, 당연한 듯 근거 없는 가치 평가로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편견이 만들어질 때다. 이것이 옳기에 다른 것은 그르다는 잘못된 확신은 자칫 위험한 갈라치기 덫을 파고 온갖 것들을 어느 한쪽으로 매몰시킨다. 이쪽이 아니면 저쪽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니라, 이쪽저쪽 모두에 제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택한 이쪽은 항상 옳기에 다른 쪽은 틀리고 나쁜 것이 되는 오만과 오류를 피하려면.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