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다 계획이 있구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정치팀장

서승욱 정치팀장

“넌 다 계획이 있구나~”. 대통령 지지율이 고전을 거듭하는 요즘 송강호 배우의 영화 속 대사 한마디가 마음속을 훅 치고 들어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에 뛰어들자마자 일찌감치 민정수석 폐지를 약속했다. 지난해 7월 언론 인터뷰에서 “청와대에 사정(司正) 기능이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 “민정수석은 국민과 대통령 사이를 좁히고, 민심을 청취하기 위해 있는 자리인데 우리는 사정 기능이 너무 강하다. 민정수석실이 대통령을 강하게 보이게 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부담으로 작용한다”며 했던 약속이다. 한 때 수석직 전부를 폐지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민정수석 폐지만은 관철했다. 민정수석을 동원해 검찰을 주무르거나 사정기능 전반을 쥐고 흔들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라 믿고 싶다.

민정수석 대신 초강력 법무장관
“아내 역할만…” 김 여사는 종횡무진
꼼수나 우회 아닌 상식 회복이 열쇠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그런데 결과적으로 정부의 사정 조직은 어떻게 돼 있나. 없어진 민정수석실 대신 ‘초강력 법무부’가 탄생했다. 대통령실 인사 라인이 모두 ‘그 나물에 그 밥’ 검찰 출신인데, 정부 인사의 검증 기능까지 법무부가 틀어쥐었고, 검찰총장이 임명되기도 전에 법무부 장관이 검찰 인사를 일사천리로 해치웠다.  ‘민정수석+법무부 장관+검찰총장’으로 불리는 울트라 파워맨은 윤 대통령이 “우리 동훈이”라고 부른다는 측근 중의 측근이다. 그 한동훈 장관이 주도한 검찰 인선에선 소위 윤석열 인맥이 승승장구했다. 탄압받는 검찰총장 시절 “인사권도 하나 없고 밖에서 다 식물총장이라고 하지 않느냐”라고 자신을 식물에 빗댔던 대통령은 ‘검찰총장 없는 법무부 장관 인사 독주’논란에 “우리 장관이 아주 제대로 잘했을 것. 검찰총장이 ‘식물’이 될 수 있겠나”라고 딴 얘기를 했다.

여권 핵심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점찍었다고 한다. 그래서 민정수석 폐지라는 결단 뒤엔 ‘한동훈 법무’라는 계획이 이미 서 있었던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이들이 많다. 대통령실은 ‘사정’에서 손을 떼지만, 대통령의 분신이 법무부에서 사정과 정부 인사를 총지휘하는 그림 말이다. 대통령실이 손을 뗐다는 ‘형식’보다 더 중요한 건 정치적 중립이란 ‘실질’인데, 대통령실과 법무부·검찰이 이미 한 몸이 됐다는 우려가 분출하고 있다.

행안부도 마찬가지다. ‘법무·행안부 장관 정치인 배제’설도 꽤 일찍 윤 대통령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대통령과 가까운 정치인이 임명되면 수사·선거에서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다는 그럴듯한 설명도 곁들여졌다. 명분은 번지르르했지만, 행안부 장관에도 윤 대통령의 고교-대학 후배가 임명됐다. 그 장관이 비대해진 경찰 권력을 통제하겠다고 경찰국을 만들면서 논란이 커졌다. “청와대 치안비서관이 행안부를 패싱하고 경찰과 직거래했던 잘못된 관행을 끊기 위함”이라는 게 정부 주장이지만 윤 대통령의 최측근이 장악한 행안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김건희 여사 문제도 그렇다. 허위 경력 등 각종 의혹이 제기되자 지난해 12월 기자회견을 열었다. 가물가물하겠지만 당시 회견의 주요 내용은 이랬다. “국민을 향한 남편의 뜻에 제가 얼룩이 될까 늘 조마조마하다. 잘 보이려 경력을 부풀리고 잘못 적은 것도 있었다. 돌이켜 보니 너무나도 부끄럽다. 모든 것이 제 잘못이고 불찰이다.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남은 선거 기간 동안 조용히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겠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는 경우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였다. 윤 대통령 측도 ‘조용한 내조’란 말로 김 여사의 입장을 지지했다. 현재 김 여사의 종횡무진 행보와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그래서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향후 광폭 행보의 복선을 미리 깔아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회견 당시부터 이미 그런 계획이 서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윤 대통령은 비상한 시기에 비상한 과정을 거쳐, 비상한 여론을 타고 대통령에 선출됐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무너진 공정과 상식에 대한 맹렬한 반작용이 그를 대통령직으로까지 끌어올렸다. 복선이나 꼼수, 변명, 국민 눈 높이에 맞지 않는 비상식적인 인선, 김 여사 활동에 대한 은근슬쩍 기정사실화등은 공정과 상식을 외쳤던 윤 대통령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검찰공화국에 대한 엄청난 우려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간발의 차로 자신을 왜 선택했는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락한 지지율도 그래야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