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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영화 '정무문' 원작자…"반공 투철했던 홍콩의 천재" [니쾅 1935~2022.7.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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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홍콩 북페어에 참석한 유명 작가 니쾅(倪匡·예광)의 모습 사진 홍콩 명보

지난 2007년 홍콩 북페어에 참석한 유명 작가 니쾅(倪匡·예광)의 모습 사진 홍콩 명보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 ‘당산대형’ 등 홍콩 대표 무협영화의 시나리오 작가 겸 소설가 니쾅(倪匡·예광)이 3일 지병으로 별세했다고 홍콩 명보가 4일 보도했다. 87세.

니쾅은 무협소설가 진융(金庸, 1924~2018), 작곡가 황잔(黃霑, 1940~2004), 미식가 차이란(蔡瀾·81)과 함께 ‘홍콩의 4대 재주꾼(才子)’으로 불렸다. 그가 공상과학 소설 ‘웨이쓰리(衛斯理)’ 시리즈를 연재한 명보는 4일 1면 전면과 7면에 부고를 싣고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월간명보’의 편집인 판야오밍(潘耀明)은 “홍콩에 전무후무했으며 다시는 오지 않을 인물”이라고 애도했다. 홍콩 작가 타오제(陶傑)는 “매우 보기 드문 천재였다”며 “세계를 관찰하는 통찰력과 정확함에 있어 전세계 중국인 가운데 가장 깨어있던 인물”이라고 기렸다.

홍콩의 대표적 일간지 명보의 4일자 1면. 소설가 겸 시나리오 작가 니쾅(倪匡·예광)의 일생을 1면 전면과 7면에 싣고 고인을 추모했다. [명보 캡처]

홍콩의 대표적 일간지 명보의 4일자 1면. 소설가 겸 시나리오 작가 니쾅(倪匡·예광)의 일생을 1면 전면과 7면에 싣고 고인을 추모했다. [명보 캡처]

1935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1957년 홍콩으로 밀입국했던 니쾅은 한자(漢字)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로 불린다. 무협과 공상과학(SF) 소설 300편 이상, 시나리오 450편 이상을 썼고 그중 300여 편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명보는 “전설의 1000만자(字)”로 그의 다작을 알렸다. 유명배우 장궈룽(張國榮·장국영)도 출연했던 TV 토크쇼 ‘오늘 밤은 무방비(今夜不設防)’에 ‘홍콩 4대 재주꾼’ 차이란·황잔과 함께 사회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사조영웅문』 등 무협 소설의 대가 진융의 『천룡팔부』를 그가 휴가로 자리를 비웠을 때 대신 집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1972년 무협 영화 당산대형의 흥행 성공 축하 연회에 참석한 이소룡(왼쪽)과 영화사 골든하베스트 설립자 레이먼드 초우(鄒文懷·추문회, 오른쪽) 사이에 안경을 쓴 30대 시절의 니쾅이 보인다. [우구이룽 페이스북 캡처]

지난 1972년 무협 영화 당산대형의 흥행 성공 축하 연회에 참석한 이소룡(왼쪽)과 영화사 골든하베스트 설립자 레이먼드 초우(鄒文懷·추문회, 오른쪽) 사이에 안경을 쓴 30대 시절의 니쾅이 보인다. [우구이룽 페이스북 캡처]

그는 삶과 죽음을 초연한 낙천적 인생관의 소유자였다. 70세이던 2005년 스스로 글감을 모두 소진했다며 봉필(封筆, 절필이란 뜻)한 뒤 젊은이와 교류를 즐겼다. 그는 “인류가 진보한 까닭은 다음 세대가 말을 안 들었기 때문”이라며 “나는 비록 ‘노인’이지만 젊은이에게 말을 듣지 말라고 격려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진보가 있겠나”며 반항을 고취했다.

진융은 생전에 니쾅을 평가하며 “무궁한 우주, 끝없는 시공, 무한한 가능성과 덧없는 인생 사이의 영원한 모순을 그는 머릿속에서 비단을 짜듯 엮어냈다”고 했다. 작가 타오제는 “니쾅은 간단하고 쉬운 문자로 가장 심오한 도리를 전달했다”며 “홍콩인은 그의 소설을 계속 읽어 지혜를 흡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니쾅(倪匡·예광, 오른쪽 두번째)과 그의 친구인 유명 작곡가 황잔(黃霑, 1940~2004, 왼쪽 첫번째), 미식가 차이란(蔡瀾·81, 오른쪽 첫번째)이 1980년대 TV 토크쇼에 출연한 영화배우 장궈룽(張國榮, 왼쪽 두번째)과 대담하고 있다. 사진 홍콩 명보

니쾅(倪匡·예광, 오른쪽 두번째)과 그의 친구인 유명 작곡가 황잔(黃霑, 1940~2004, 왼쪽 첫번째), 미식가 차이란(蔡瀾·81, 오른쪽 첫번째)이 1980년대 TV 토크쇼에 출연한 영화배우 장궈룽(張國榮, 왼쪽 두번째)과 대담하고 있다. 사진 홍콩 명보

니쾅은 홍콩 이주 후 본토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을 정도의 반공주의자로 유명했다. 10대 시절 화둥(華東)인민혁명대학에서 석 달 간 훈련을 받고 공안 간부가 되어 내몽고 노동 개조 농장에서 감독관으로 근무했다. 당시 현지 군인과 갈등 끝에 ‘반혁명’ 혐의로 홍콩으로 밀입국했다. 이후 홍콩 시사 주간지 ‘아주주간’이 그의 이주 50주년을 맞아 대규모 귀향 행사를 중국 측과 함께 마련했으나 끝내 방문을 거절했다.

1990년대 홍콩 반환 전에는 TV에 출연해 “반환 뒤의 홍콩은 대규모 난민 캠프가 될 것”이라며 “영국은 홍콩인을 남미의 섬으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SF 대표작 『추룡(追龍)』에서 동양의 한 대도시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그 원인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자유’라는 장점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소설은 중국과 영국은 홍콩 반환을 놓고 담판 중이었을 때 집필했으며, 니쾅은 나중에 작품 속 동양의 도시는 홍콩이라고 언급했다.

니쾅은 ‘일국양제(한 나라 두 체제)’의 허구성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2019년 홍콩 공영방송 RTHK와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일국양제가 무너진다고 말할 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이 모든 것을 결정할 뿐 일국양제 같은 것은 없다”고 지적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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