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XX 너 오늘 죽인다" 달려들어도 훈방…응급실 의사들 떤다

중앙일보

입력 2022.07.04 05:00

업데이트 2022.07.04 07:23

지난 3월 16일 서울의 한 상급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20대 남성이 처치를 거부하며 난동을 피우고 있다. [제보 영상 캡처]

지난 3월 16일 서울의 한 상급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20대 남성이 처치를 거부하며 난동을 피우고 있다. [제보 영상 캡처]

“야 이 씨XX아, 너 내가 오늘 죽인다.”
지난 3월 16일 유리에 손을 베인 20대 남성은 응급실 의료진을 향해 폭언을 퍼부었다. 진료를 거부하며 반말을 하는 환자에게 의료진이 “반말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뒤 벌어진 일이다. 만취한 남성은 욕설을 퍼부으며 책상 위 의료기기를 던질 듯 위협했다. 응급실 보안요원은 기기를 던지지 못하게 잡고만 있을 뿐,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했다. 상의까지 풀어헤친 남성은 의료진을 향해 달려들었고, 결국 출동한 경찰이 끌고 나갔다. 그는 서너 시간 뒤 훈방 조치됐다. 이후 남성은 다시 병원에 와서 의료진을 협박했고 1시간 넘게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 병원 의료진 A씨는 “한 달에도 수십번 발생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보안요원들은 민원·고소 사태로 번질까 적극 대응하지 못하고 경찰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하소연했다.

의사 10명 중 8명 폭언·폭행 경험

응급실 난동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대한의사협회(의협)가 지난 1일 응급의학과 의사(전문의 596명, 전공의 175명) 771명을 대상으로 한 ‘응급실 폭력 방지를 위한 긴급 설문조사’에서 “최근 1년 이내에 환자나 보호자로부터 폭언 또는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는 응답은 78.1%였다. 신변에 위협을 당했을 때 대응으로는 44.9%가 ‘참는다’고 답했다.

지난 24일 부산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60대 남성 A씨가 휘발유를 바닥에 뿌리고 불을 지른 장면. [KNN 영상 캡처]

지난 24일 부산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60대 남성 A씨가 휘발유를 바닥에 뿌리고 불을 지른 장면. [KNN 영상 캡처]

지난달 15일 경기도 용인시의 한 병원 응급실에선 70대 남성이 응급의학과 의사의 목 부위를 낫으로 내리쳐 10㎝가량 찢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인이 심정지 상태로 이송된 후 숨진 뒤 벌어진 일이었다. 같은 달 24일 부산대병원 응급실에서는 술에 취한 60대 남성이 불을 질렀다. 응급실에 실려 온 자신의 아내를 먼저 치료해주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큰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환자와 의료진 등 47명이 긴급대피했고 응급실 운영이 11시간 동안 차질을 빚었다.

‘임세원법’ 만들 때만 반짝 관심

의료진 폭행에 대한 경각심이 가장 높았던 건 2019년이다. 2018년 12월 말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피습으로 사망한 이듬해 ‘임세원법’으로 불리는 의료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의료기관에서 의료인을 폭행해 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상 7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중상해의 경우 3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 사망은 5년 이상 징역 또는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다. 또 100병상 이상 의료기관에는 경찰과 연결된 비상벨을 설치하고 1명 이상의 보안 인력을 의무적으로 배치하도록 했다.

4일 서울 종로구 서울적십자병원에서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발인이 엄수되고 있다. 임 교수는 지난달 31일 평소 양극성정동장애(조울증)를 앓던 박모씨(30)가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잃었다. 유족들은 고인의 생전 소명의식대로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에 분명히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2019.1.4/뉴스1

4일 서울 종로구 서울적십자병원에서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발인이 엄수되고 있다. 임 교수는 지난달 31일 평소 양극성정동장애(조울증)를 앓던 박모씨(30)가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잃었다. 유족들은 고인의 생전 소명의식대로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에 분명히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2019.1.4/뉴스1

의료기관 내 폭행 사건은 매년 2200~2500건 발생하고 있다. 전국에서 하루 평균 6명 이상의 환자가 의사를 향해 달려드는 셈이다. 한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경찰이 출동해도 일반 주취자를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응급실에서 수 시간 대치하며 설득하는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의협이 지난 2019년 약 2000명의 회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경찰에 환자를 신고해 처벌에 이른 비율은 10% 정도였다. 신고 후 피의자나 수사기관의 요청에 따라 고소ㆍ고발을 취하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게 의협 측 설명이다.

“반의사불벌 폐지 등 처벌 강화해야”

김현 응급의학회 기획이사(연세대학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지난 1일 국회에서 열린 ‘법조ㆍ의료인력에 대한 보복성 폭력 행위 방지대책 긴급토론회’에서 “개인이 고소하면 지역사회나 병원에서 고소 취하를 종용하는 사례가 많다. 이 때문에 의료인에 대한 범죄가 벌어져도 실제로 법정으로 가는 사건이 적다”라며 “폭행이 발생했을 때 신고를 의무화해 지역 사회에서 의료진을 폭행하면 꼭 고소를 당한다는 사회적 인식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울=뉴스1) 유승관 기자 = 이필수 대한의사협회장이 17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임시회관에서 의사대상 흉기상해사건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15일 용인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발생한 의사대상 흉기상해사건이 '살인 의도가 명백한 중범죄'라며 가해자에 대한 엄벌과 의료기관 내 의료인 폭행 사건 재발 방지를 촉구했다. 2022.6.17/뉴스1

(서울=뉴스1) 유승관 기자 = 이필수 대한의사협회장이 17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임시회관에서 의사대상 흉기상해사건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15일 용인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발생한 의사대상 흉기상해사건이 '살인 의도가 명백한 중범죄'라며 가해자에 대한 엄벌과 의료기관 내 의료인 폭행 사건 재발 방지를 촉구했다. 2022.6.17/뉴스1

의학계에선 “의료인 가해행위 처벌 조항을 ‘특가법(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으로 규정해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전성훈 의협 법제이사)는 주장도 나온다. 또 정부 지원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이필수 의협 회장은 지난달 17일 긴급기자회견에서 “의료인 폭력사건을 막겠다고 강구한다는 대책들이 뒷문, 비상벨, 안전전담요원 등인데 오히려 이 대책들이 의료기관에 대한 규제로 돌아올 뿐 실효성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의료기관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은 엄연히 공익적 영역이기에 의료인에 대한 안전과 보호를 보장하는 일 역시 공익활동이다. 정부가 전적으로 부담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절박한 환자 세심한 배려도 필요”

응급실 내에서 의료진과 환자의 소통이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성주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대표는 “응급실 내 폭력 사태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다. 그러나, 환자들이 피해의식을 갖고 극단적인 행위를 벌이는 원인도 따져봐야 한다”며 “응급실 내에서 환자와 보호자에게 좀 더 세심한 배려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통상 응급실에서는 의료진이 절차나 과정만을 내세우다 보니 절박한 심리의 환자나 보호자들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나 보호자의 심리를 안정시킬 수 있도록 소통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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