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송인한의 퍼스펙티브

대학 ‘갭이어’ 제도는 세계적 추세, 다양한 경험 쌓을 필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취업률의 덫에 갇힌 대학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 교수, 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장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 교수, 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장

과연 교육열일까? 2008년 83.8%로 정점을 찍었던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현재 약 70%로 떨어졌으나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40%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다. 과거 우리나라의 높은 대학 진학률은 인적자본으로 대한민국의 자원이라 여겨졌지만, 교육의 본질에서 벗어난 과열된 경쟁에는 어두운 결과 또한 낳았다.

입시산업이라 불러도 될 만큼 거대한 연간 20조원 규모의 사교육 시장이 만들어지며 공교육은 힘을 잃고 붕괴하였다. 그뿐인가, 현대판 맹모삼천지교는 부동산 시장에 적용되어 부동산 가격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입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부동산 문제는 잡지 못할지 모른다.

대학 입학 전, 재학 중에 여행·봉사 등으로 자기만의 시간
하버드·프린스턴 등 명문대, 학생들 글로벌 인턴십도 제공
넓은 세상 보고 인격 키워야 지속가능한 미래 만들 수 있어
재정적·제도적 지원 필요 … 전공 공부는 온라인 플랫폼 활용

정치적 정의 역시 과도한 입시 경쟁과 무관치 않다. 돌이켜보건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이슈가 국민 정서를 자극해 확대되었던 것은 장관직 수행 능력 차원이 아니라 자녀 입시 의혹과 연관되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시발점 역시 측근 자녀의 입시 비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적 불공정은 참아도 입시 불공정은 참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첨단과학의 시대에 입시와 관련해서는 비합리적 일들이 벌어진다. 수능 당일 국민적 긴장으로 인해 입시 한파가 있다는 비과학적인 말조차 뉴스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만큼 대학입시는 전국적 관심사다. 각종 종교기관마다 입시 철은 대목이다. 너도나도 합격을 기도하니 하느님이 곤란해 손사래 치며 그냥 성적순으로 합격하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교육열 아닌 입시열로 전락

송인한의 퍼스펙티브

송인한의 퍼스펙티브

그렇게 힘든 과정을 통해 들어간 대학에서 학생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다면 이런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소년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성장해야 할 시간을 입시 경쟁에 빼앗기고, 화목한 가족 관계의 기회를 입시 준비의 바쁨과 긴장으로 잃어버린다.

은퇴 후를 위해 준비해야 할 부모의 노후 자금을 교육비로 통째로 쓰는, 과도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다닐 만큼 대학을 보람 있게 다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먼저 풀려야 한다. 만약 대학 입학이 그 이후의 취업을 위한 ‘스펙’으로 사용되기 위한 경쟁 때문이라면 이런 큰 사회적 손실이 없다. 그리고 그 광풍은 교육열이 아니라 그저 입시열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지금의 청년 세대가 경제적 불안을 느끼는 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매년 진행하는 미국의 대학생 설문조사에서 2012년부터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좋은 직장을 가지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대학 진학의 첫 번째 목표로 올라섰다. 80% 이상의 미국 대학생이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삶이 필수적이자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응답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은 대부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 불안과 경제적 양극화의 좌절을 경험한 가정에서 자란 세대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위축된 희망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하는 시대에 자란 세대다. 숨 쉴 틈 없는 입시 경쟁 속에서 사춘기의 시간은 박탈당하고 모든 행복이 합격 이후로 미뤄져 온 세대이기도 하다. 생존을 위한 각박한 경쟁사회에서 입시의 부담을 짊어졌던 이들이 자신과 사회에 관대할 여유를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은 사회의 책임이 아닐까.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여유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청년 세대에게 곧장 어른이 되라는 책임을 지우는 것은 가혹하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자아 정체성은 전통적으로 사춘기 질풍노도 시기의 방황과 고민을 통해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 정치적 이념의 정체성, 영적 정체성을 형성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나’를 찾는 정체성 확립은 속성 멘토링으로는 이뤄지기 어려우며 스스로 부딪히고 고민하는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

‘갭이어’는 자아 발견과 충전 시간

공백의 시간을 뜻하는 ‘갭이어(gap year)’는 18세기 영국에서 귀족 자제들이 여행을 통해 세계를 돌아본 콘티넨털 투어의 전통에서 시초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부유층의 사치스러운 여행이었다기보다 전통적인 대학 교육에 대한 비판으로서 넓은 세상을 보며 인격의 성숙을 추구한다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서구 대학으로 넓게 퍼져, 대학 입학 전 혹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이나 졸업 후 사회 진출 전에, 여행이나 자원봉사·인턴십 등을 통해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자아를 발견하고 충전하는 시간으로 확대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미국 대학은 갭이어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며 개인적으로 선택하는 활동뿐 아니라 학교 정규 프로그램으로 구성하고 있다. 프린스턴대는 ‘브리지 이어 프로그램(Bridge Year Program)’을 통해 볼리비아·인도네시아·중국 등 해외에서 문화와 언어를 배우며 봉사활동을 하게 함으로써 학생들의 문화적 시야를 넓혀주고 있다. 매세추세츠공대(MIT)와 웰즐리대는 신입생과 예비 지원자 전원에게 갭이어를 강력히 추천하고 있어 학생들이 한국의 하자센터 등에서 글로벌 인턴십 프로그램을 학교의 강력한 지원 아래 수행하고 있다.

매년 100명 이상의 신입생이 입학 전 갭이어를 체험하는 하버드대도 성공적인 대학 생활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갭이어 경험자들은 ‘하버드 갭이어 소사이어티’라는 모임을 구성해 경험을 공유하며 모든 학생이 갭이어를 가질 것을 조언할 만큼 성공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청년에게 여유 허락하는 사회

우리 사회에서는 휴학을 한다고 하면 주눅 드는 마음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 시간은 공부를 쉬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경험을 통해 더 좋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성숙시키는 시간이다. 그러나 갭이어에는 부담도 따른다. 시간의 압박이 무거운 우리 사회에서는 동료들보다 뒤처지거나 집단에서 홀로 단절된다는 심리적 부담을 느끼곤 한다. 특히 풍부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기에 경제적으로 넉넉한 학생들이 향유하며 불평등의 격차가 더 커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개인에게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풍성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제도적·재정적 지원을 모두에게 제공해야 할 것이다. 또 과거와 달리 온라인으로 연결될 수 있는 현재는 코세라(Coursera)·에드엑스(EdX)·연세대의 런어스(LearnUS) 같은 온라인 교육 플랫폼을 통해 세계 어디서든 갭이어를 가지면서 필요할 때는 연결되어 소속감을 느끼며 다양한 경험을 교육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 그야말로 세계가 캠퍼스가 되는 유비쿼터스 교육이 가능하다.

입시를 위해 다른 꿈을 접어두고 달려올 수밖에 없던 이 시대의 청년들이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바란다.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관대한 시간을 선물함으로써 주위를 향한 관대한 마음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란다. 소외된 동료 인류를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 봉사의 시간을, 실제로 돌아가는 산업의 세계를 체험하는 시간을, 다양한 문화권의 관점과 경험을 통해 시야를 확장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그들의 학업이 의미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때론 그런 부담조차 없이 아무 계획 없는 자유로운 여행도 좋고 멍때리기도 좋을 것이다. 청년들이 자신을 찾고 세상을 경험하는 여유를 통해 한층 성숙해 돌아오는 것을 허용하고 기다릴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그런 여건과 제도를 만드는 숙제를 대학과 사회는 더는 미뤄선 안 된다. 근시안적으로 당장의 취업자를 만드는 데 급급해선 지속가능한 미래사회를 만들 수 없다. 넓은 세상, 다양한 문화, 소외된 인류를 보고 느끼며 성숙하여 돌아오라. 온 세상이 캠퍼스다.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 교수·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