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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세정의 시선

돌연 尹정책에 박수 치더라…"알박기 인사 59명" 그들의 생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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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한덕수 총리의 지난달 29일 출입기자 간담회 발언은 아슬아슬했다. 문재인 정부 초대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에 대해 “(문 정부) 소득주도성장 설계자가 KDI 원장으로 앉아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공개적으로 거부감을 표출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 2일 홍 원장뿐 아니라 정해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을 겨냥해 “국가정보원 개혁위원장 시절 자신이 적폐라고 불렀던 세력이 집권했는데도 알박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총리 산하 공공기관인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KDI 등 국책연구원을 총괄해 영향력이 막강하다.

문 정부 낙하산 인사들 자리 연연 #한덕수 총리, 불신임 직격탄 날려 #제도 손질해 국가적 낭비 줄여야

2017년 7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김은경 환경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대화하고 있다. 김 장관은 환경부 산하 단체장들을 강제 사퇴시킨 '블랙리스트' 연루 혐의로 구속돼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사진 오른쪽은 임종석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왼쪽 뒤는 조국 당시 민정수석. [청와대사진기자단]

2017년 7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김은경 환경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대화하고 있다. 김 장관은 환경부 산하 단체장들을 강제 사퇴시킨 '블랙리스트' 연루 혐의로 구속돼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사진 오른쪽은 임종석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왼쪽 뒤는 조국 당시 민정수석. [청와대사진기자단]

 정권이 바뀌면 당연히 짐을 싸야 한다고 여겼는데, 물러난 정부에서 임명된 장관급 인사들과 국책 연구기관장들의 진퇴를 놓고 지금처럼 갑론을박이 뜨거운 적이 있었나 싶다. 정치 노선과 정책 방향이 너무 다르니 깔끔하게 물러나는 것이 공직자의 도리라는 지적이 많지만, 주어진 임기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선다.

2018년 3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 초청 오찬에서 정해구 위원장으로부터 자문안을 전달받고 있다. '친문' 인사로서 국가정보원 '적폐' 청산을 주도한 정 위원장은 정권 교체 이후에도 KDI 등 국책연구원들을 총괄하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자리를 지켜 논란이다. [연합뉴스]

2018년 3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 초청 오찬에서 정해구 위원장으로부터 자문안을 전달받고 있다. '친문' 인사로서 국가정보원 '적폐' 청산을 주도한 정 위원장은 정권 교체 이후에도 KDI 등 국책연구원들을 총괄하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자리를 지켜 논란이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 출범 두 달이 다가오는데도 이런 사단이 계속되는 배경엔 문 정부의 원인 제공 책임이 크다. 문 정부 초대 김은경 환경부 장관은 박근혜 정부가 임명한 산하 기관장들에게 사퇴 압력을 가한 혐의로 구속됐고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블랙리스트' 의혹이 제기된 산업자원통상부 등에서도 수사가 진행 중이다. 이제 정권이 바뀌더라도 공공기관장의 사표를 강제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런 맹점을 노린 듯 문 정부는 대통령 임기가 6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 알박기 인사를 강행했고 요직을 꿰찬 인사들이 버티면서 신·구 정권이 얼굴을 붉히고 있다. 국민의힘 자체 집계에 따르면 문 정부 임기 말 공공기관 알박기 인사는 기관장급 13명, 이사·감사 46명 등 59명이나 된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이런 비상식의 최종책임자는 문 전 대통령”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2017년 8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홍장표(오른쪽) 경제수석과 웃고 있다. 실패라는 비판을 받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추진한 홍 수석은 2021년 5월 한국경제연구원(KDI) 원장에 부임했다. 홍 원장 거취에 대해 한덕수 총리는 최근 "우리(윤석열 정부)하고 너무 안 맞는다"고 비판했다.[중앙포토]

2017년 8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홍장표(오른쪽) 경제수석과 웃고 있다. 실패라는 비판을 받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추진한 홍 수석은 2021년 5월 한국경제연구원(KDI) 원장에 부임했다. 홍 원장 거취에 대해 한덕수 총리는 최근 "우리(윤석열 정부)하고 너무 안 맞는다"고 비판했다.[중앙포토]

 친문으로 분류되는 김용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임기를 1년여 남겨두고 대선 직후 자진해서 사퇴한 정도가 예외적이다. 자리를 지키는 공공기관장들의 행태를 보면 무작정 버티고 보자는 배짱형, 다음 총선 출마를 계산하는 정치투사형, 사퇴할지 말지 오락가락하는 햄릿형, 정치 노선을 급변침한 카멜레온형과 생계형 등 각양각색이다.
 대통령이 의장을 맡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헌법 92조에 근거한 대통령의 평화통일정책 자문기관인데, 민주당에서 5선 국회의원을 지낸 이석현 수석부의장은 물러날 기미가 안 보인다. 사퇴 여론이 비등하자 지난 1일 이 수석부의장은 “윤 대통령 내외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외교는 성공적인 첫선 무대였다”며 갑자기 긍정적 평가를 했다.

2017년 10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석현 민주당 의원과 악수하고 있다. 민주당 소속으로 5선 의원을 역임한 이 전 의원은 지난 5월 정권 교체 이후에도 윤석열 대통령의 자문기관인 민주평동 수석부의장 자리를 지켜 사퇴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사진 가운데는 정동영 당시 국민의당 의원. [청와대]

2017년 10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석현 민주당 의원과 악수하고 있다. 민주당 소속으로 5선 의원을 역임한 이 전 의원은 지난 5월 정권 교체 이후에도 윤석열 대통령의 자문기관인 민주평동 수석부의장 자리를 지켜 사퇴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사진 가운데는 정동영 당시 국민의당 의원. [청와대]

 문 정부 때 임명된 인사가 자리를 고수하니 후속 인사도 파행이다. 문 정부 때 임명된 김사열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이 임기를 채우려 하자 윤 대통령은 내정한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에게 임명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임명한 추경호 경제부총리 등 11명의 장관(당연직 위원)을 데리고 김 위원장이 회의를 주재하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진다.
 새 정부와 국정 철학이 다른 공공기관장이 계속 버티면 결국 국가적 낭비가 될 수 있다. 조직원들이 술렁이고 일이 제대로 돌아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금융위원회는 기존 위원장이 사의를 밝혀 정권 교체기를 큰 분란 없이 보내고 있다. 반면 윤석열 대통령이 "(정식 참석 대상이 아니니) 국무회의에 굳이 올 필요가 없다"며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과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에 대해 불신임 의사를 내비치자 두 기관의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하다고 한다.

2019년 9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기념촬영하는 모습. 한 위원장은 최근 변호사법·공무원법·방통위법 '겸직 의무' 위반 논란에 휩싸였다.[청와대사진기자단]

2019년 9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기념촬영하는 모습. 한 위원장은 최근 변호사법·공무원법·방통위법 '겸직 의무' 위반 논란에 휩싸였다.[청와대사진기자단]

 방통위 관계자는 "한 위원장 거취가 불투명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전했다. 민주당 출신인 전현희 권익위원장이 사퇴를 거부하자 국민의힘 측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앉아 다른 목적을 생각하니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소모적인 논란을 없애려면 제도 개선이 절실하다. 정권이 교체되면 여야의 입장이 피장파장이니 궁극적으로 관련 법을 정비해야 한다. 대통령이 바뀌면 거의 모든 정무직이 사표를 내는 미국처럼 한국도 정치적 중립성이 꼭 필요한 자리를 제외하면 새 대통령이 새 기관장과 호흡을 맞추도록 배려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외교부 산하 공관장들이 일괄사표를 제출하고 선별해 재신임하는 방식을 참고할 만하다.

2020년 7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뒤 기념촬영하는 모습. 권익위는 반부패 감시기구인데도 수장인 전 위원장은 문 정부에서 발생한 각종 공직자 비리와 부정부패 척결에 소극적이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권교체 이후에도 사퇴를 거부해 논란이 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20년 7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뒤 기념촬영하는 모습. 권익위는 반부패 감시기구인데도 수장인 전 위원장은 문 정부에서 발생한 각종 공직자 비리와 부정부패 척결에 소극적이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권교체 이후에도 사퇴를 거부해 논란이 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제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올바른 공직관이다. 공직을 출세와 생계 수단 정도로 가볍게 보거나 심지어 정쟁의 도구로 악용하는 염치 없고 천박한 공직관을 바로잡아야 한다. "나는 왜 지금 이 자리에 연연하는가." 공직자들이 스스로 던져야 할 질문이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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