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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찾아온 중학생이 대뜸 "아들 도박빚 500만원 갚으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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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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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김한모(가명)씨는 직장에서 망신을 당했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여느 때처럼 일하는데 ‘아들 친구’라는 중학생 또래의 아이들이 찾아왔다. 사전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손님에 당황하는 김씨에게 아이들은 “아드님이 우리에게 500만원을 빌렸는데 못 갚고 있으니, 아버님이 대신 갚아달라”고 말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일단 아이들을 보낸 뒤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알아본 김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아들이 온라인 불법 도박을 하다 친구들에게 손을 벌렸는데, 결국 원금에 이자까지 불어나 갚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어떻게 아버지 직장까지 찾아올 수 있느냐”는 호통에 아들은 또 한 번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나도 다른 친구 부모님 직장에 돈 받으러 갔었어.”

도박 중독 청소년 5년 사이 3배로

김씨의 경우처럼 황당한 상황에 부닥친 부모들은 더 있을 공산이 크다. 청소년 불법 도박이 매해 심각해지는 추세라는 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3일 김승수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 사이 실시된 청소년 도박 상담 건수는 1만2950건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같은 기간 도박 중독으로 진료받은 청소년은 7063명이었다. 2017년 837명이던 청소년 도박 중독 진료는 지난해 2269명으로 5년 사이 약 3배로 늘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코인대박’ 등 한탕주의 문화가 청소년 도박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에서 청소년 도박 중독 상담을 맡았던 한 상담사는 “불법 도박에 대한 접근성이 커진 것도 있지만, 코인으로 대박을 낸 청소년 등이 이슈가 되면서 아이들의 상대적 박탈감도 커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런 성취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아이들은 과정보다 결과에 방점을 두고 한탕주의를 더 꿈꾸며 도박에 빠진다”고 설명했다.

청소년 도박, 2차 범죄 불러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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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도박으로 검거되는 청소년도 증가하고 있다. 김승수 의원이 이날 공개한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최근 5년간 불법 도박으로 인해 검거된 청소년은 총 381명이었다. 이 중 학교 밖 청소년이 192명으로 절반(50.4%) 정도다. 학교 밖 청소년은 초·중·고교 입학 후 결석 기간이 3개월 이상인 청소년, 중·고교 퇴학·자퇴 청소년 등을 말한다.

청소년 도박 중독 상담사는 “도박 중독 예방 교육을 위해 학교를 방문해보면 생각이나 통계보다 훨씬 더 많이 아이들이 도박에 노출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며 “도박을 위해 급전을 빌려준 뒤 고금리로 받아내고, 안 되면 부모를 협박·압박하는 형태의 일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우려되는 건 누군가의 피해자는 다른 누군가의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청소년 불법 도박은 자금을 마련하려는 과정에서 보험사기, 성매매 등 불법적인 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인 범죄자들은 청소년을 ‘도구’로 이용하기도 한다. 한 상담사는 “도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성인 불법 도박 자금 운반책 아르바이트를 한 학생이 돈을 운반하다 욕심이 나서 조금 챙겼다. 그랬다가 조직폭력배들에게 크게 폭행을 당한 사건들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는 성인들이 수사당국의 눈을 조금이라도 쉽게 피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청소년들은 한 번 그런 세계에 발을 들이면 쉽게 빠져나오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의지로 못 고쳐…캠페인 강구해야”

보다 적극적인 청소년 도박 중독 치료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박사는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산하에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가 있지만, 기능과 인력, 예산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불법도박사이트를 확인해도 셧다운 할 수 있는 능동적 권한이 없다”며 “도박은 의지로 고칠 수 없는데, 특히나 충동성이 강한 청소년이라면 ‘예방 교육 30시간 의무 이수’와 같은 기계적 교육 이수가 아니라 더 개별화된 맞춤형 치료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승수 의원은 “각종 프로그램이 학교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학교 밖은 사각지대에 놓이기 쉽다”며 “금연 광고 ‘노담’과 같이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불법도박의 위험성을 알릴 수 있는 캠페인을 강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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