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일어판 필름만 남은 국내 첫 극장용 장편 애니 '홍길동' 한글 제목 되찾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 최초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탄생 55년만에 4K 화질로 복원됐다. 복원 후 장면.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한국 최초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탄생 55년만에 4K 화질로 복원됐다. 복원 후 장면.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복원 전 장면.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복원 전 장면.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한국 최초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이 한국어 타이틀을 되찾았다.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이 올해 개봉 55주년을 맞은 ‘홍길동’을 4K 화질로 복원해 지난달 15일 유튜브·네이버TV에 공개했다. 2주 만에 약 3만5000명이 시청했다. 댓글 반응도 뜨겁다. “1967년도에 이런 수준의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다니 정말 놀랍네요” “이 시절만 해도 일본에 절대 밀리지 않는 작화네요” 등 ‘최초’의 의미 그 이상의 완성도란 감탄이 나온다.
한국이 애니메이션 불모지였던 시절 신동헌(1927~2017) 감독이 동생 신동우 작가의 학생 일간지(소년조선일보)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 하는 조선시대 양반 가문 서자 홍길동이 백운 도사에게 도술을 배워 단짝 차돌바위, 활빈당과 함께 탐관오리를 무찌른다. 최초 한글 소설인 허균의 원작 『홍길동』을 관아부터 깊은 산속, 벼랑 끝, 동굴 등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액션과 요괴가 출몰하고 해골이 춤을 추는 판타지 장면으로 재해석했다. 외국 것을 무턱대고 흉내 내기보단 한국적인 동작을 고민해, 당시 서울에서만 50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애니 제작에 물꼬를 텄다.

영상자료원 '홍길동' 4K 복원판 온라인 공개 #사라진 필름 2008년 일본서 찾아 심화 복원 #일본어 제목·크레디트 모두 한국어로 수정 #내달 시네마테크KOFA 기획전서 극장 상영

일본판 필름만 남아…제목·크레디트 한국어 복원

이런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운드 필름만 남아있고 화면 필름이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2008년 일본에서 16㎜ 필름을 극적으로 발견해 영자원이 보유해왔다. 당시 신 감독은 영자원에 “잃었던 자식을 찾은 기분”이란 소감을 전했다. 일본 수출용 필름이다 보니 제목도, 제작진 이름도 모두 일본어. 2016년까진 일본판 필름을 그대로 디지털 변환한 버전이 국내 상영 및 DVD(‘신동헌 애니메이션 컬렉션’) 등으로 공개됐지만, 이번 4K 심화 복원 과정에서 모두 한국어로 바꿨다. 화질과 음향도 개선했다.

1967년 개봉 당시 '홍길동' 광고 [중앙포토]

1967년 개봉 당시 '홍길동' 광고 [중앙포토]

‘홍길동’ 복원 작업에 참여한 영자원 영상복원팀 홍하늘씨는 “당시 디즈니 풍의 부드러운 동작 대신 한국 나름의 창의적 응용을 한 고유의 동작과 표현방식을 고민한 작품이고, 셀에 일일이 붓으로 쌓아 올린 채색의 아름다움이 상당하다”면서 “디지털 복원 작업도 비교적 수월하리라는 예상은 처음부터 어긋났다”고 했다.
무엇보다 ‘홍길동’은 실사 영화에 우선순위가 밀렸던 애니메이션이 지난해부터 디지털 심화 복원된 첫 사례란 의미가 크다. 홍씨는 서면 인터뷰에서 “영자원의 디지털 복원 사업은 2007년 처음 시작한 이후 극영화 실사 필름에 집중해왔다”면서 ‘홍길동’의 4K 복원 작업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필름도 디지털 복원을 하기 시작하게 됐다”고 짚었다.

-이번 ‘홍길동’ 4K 복원작업의 의미는.  

“디지털 복원은 숙련된 장인이 원형의 모습을 하나하나 손으로 되살려가는 ‘문화재 복원’에 가깝다. 한국 애니메이션 사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 일본 개봉판의 형태로 공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최대한 원본 형태에 가깝게 살렸다는 의미가 크다.”

'홍길동'은 일본으로 수출된 필름을 2008년 발견해 한국영상자료원이 복원을 맡았다. 화질과 음향을 개선하고, 현지 상영에 맞춰 변형됐던 오프닝 타이틀과 크레디트 등을 모두 한국어로 바꿨다. 사진은 복원 전.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홍길동'은 일본으로 수출된 필름을 2008년 발견해 한국영상자료원이 복원을 맡았다. 화질과 음향을 개선하고, 현지 상영에 맞춰 변형됐던 오프닝 타이틀과 크레디트 등을 모두 한국어로 바꿨다. 사진은 복원 전.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4K 복원 후 한국어 제목으로 바꾼 오프닝 타이틀. 제목 서체는 당시 영화 포스터 이미지에서 추출해 복원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4K 복원 후 한국어 제목으로 바꾼 오프닝 타이틀. 제목 서체는 당시 영화 포스터 이미지에서 추출해 복원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2008년 ‘홍길동’ 필름을 되찾은 후 이번 복원까지 14년이 걸렸는데. 

"한국 필름 아카이브 구축에 있어서 ‘홍길동’ 복원은 하나의 숙제였다. 2008년 필름을 찾아냈지만 실사 극영화 필름들의 디지털 복원이 많이 적체되어 손대지 못 하다가, 2016년 4K 해상도 스캔이 가능한 장비를 마련하면서 DVD 발간(‘신동헌 애니메이션 컬렉션’)을 위한 디지털 변환 작업들을 하게 됐다. 당시엔 프레임(완성된 영상을 구성하는 각 장의 이미지) 단위 복원까지 못 했는데, 최근에 와서 가능해져 ‘홍길동’을 프레임 단위로 심화 복원했다.”

1967년 개봉 4일 만에 10만의 관객을 모은 한국 최초의 극장용 컬러 애니메이션 `홍길동`을 만든 고 신동헌 감독. [사진 KBS]

1967년 개봉 4일 만에 10만의 관객을 모은 한국 최초의 극장용 컬러 애니메이션 `홍길동`을 만든 고 신동헌 감독. [사진 KBS]

‘홍길동’은 실사 영화 복원과는 다른 애니메이션 ‘원본’의 영역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실사 영화 필름의 얼룩과 잡티는 제거 대상이지만, ‘홍길동’ 같은 초기 애니메이션 필름은 제작 여건이 열악해 미군이 쓰고 남긴 정찰용 항공필름을 재활용한 저품질 셀을 사용했기 때문에 필름의 잡티를 ‘원본’의 특성으로 여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을 필름이 재복사되고 유통되며 생긴 얼룩‧흠집과 구분하는 작업도 필요했다.
또 인물과 배경을 각각 그린 셀을 여러 장 겹쳐 효과를 내는 셀 애니메이션 특성상 화면 영상이 진행돼도 특정 셀의 얼룩이나 먼지 자국이 제자리에 멈춰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관객이 용인할 수 있는 범위를 고려해 적정선에서 복원했다”고 했다. “제 자리에 박혀 있는 먼지 자국을 완전히 지우는 것은 화면 내 포함된 자막을 지우는 것과 같은 고비용, 고난도 프로젝트였다”고 덧붙였다.

-제작 당시 재활용 셀 상태가 좋지 않아 촬영 직전까지 물감을 덧바르며 촬영한 부분도 있었다던데.  

“인물에 붓 터치 자국이 많이 남아있는 것은 연출 의도라기보다 불가피하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을 말끔하게 밀어버리거나 색 차이를 완벽하게 조정하는 것은 원본을 해치는 것으로 판단해 건드리지 않았다. 다수의 셀을 사용하면서 셀 간의 정렬이 틀어져 배경끼리, 인물끼리 조금씩 울렁거리며 움직인다거나, 달리는 말 다리 등 복잡한 윤곽선에서 광량이 떨어지는 조명 탓에 빛이 난반사 돼 화면에 음영이 발생하는 현상도 관찰되지만 보존해야 할 기록이라고 판단했다.”

-사운드에서도 전반적으로 울림이 느껴지는데.  

“어느 정도는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1980년대 이후 극장용 애니메이션에서도 그런 경우가 발견된다. 아니면 성우 더빙 환경이 열악했던 시절의 어쩔 수 없는 현상일 수 있다. 소음 차단이 완벽하지 않은 녹음실을 사용하거나 적은 수의 마이크를 여러 명의 성우가 돌려썼다는 얘기는 영화인들의 구술에도 종종 언급된다.”

'홍길동'에선 홍길동(왼쪽부터)이 차돌바위와 함께 부패 관료들을 응징하며 활빈당의 우두머리가 되는 여정이 담긴다. 복원 후 장면.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홍길동'에선 홍길동(왼쪽부터)이 차돌바위와 함께 부패 관료들을 응징하며 활빈당의 우두머리가 되는 여정이 담긴다. 복원 후 장면.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복원 후 영화의 한 장면.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복원 후 영화의 한 장면.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홍길동’은 한국 관객이 처음 극장에서 즐긴 총천연색 토종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다. 2016년 ‘홍길동’ DVD 소책자에서 심혜경 영화사연구자는 “1967년은 한국 영화 장르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해”라며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 영화들을 수입해 수익을 내던 세기상사는 이 해에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공상과학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를 통해 국내 기술로 셀 애니메이션과 특수효과를 선보이며 어린이 영화의 장을 열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진로소주 등 애니메이션 광고를 주로 만든 신동헌 감독이 서울 한남동 세기상사 촬영소 지하에서 30여명 스태프와 시행착오를 거쳐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새로 썼다. 합동영화사 제안으로 신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 ‘호피와 차돌바위’도 1967년 개봉했지만 두 작품 다 제작사와 갈등을 겪었다. 알려진 ‘홍길동’ 제작비는 당시 보통 실사 극영화보다 5배 많은 수준인 3500만원. 제작사들이 극영화를 주로 만들다 보니 비용과 전문 인력이 더 많이 들고 제작 기간이 긴 애니메이션에 대해 이해가 부족해 생긴 불협화음으로 연구자들은 풀이한다.

'홍길동' '호피와 차돌바위' 올여름 극장 상영 

홍씨는 “부족한 재원과 여건 속에서 시도된 ‘홍길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결국엔 이후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의 명맥을 잇는 동력이 됐다. 한국 애니메이션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면서 “필름으로만 남아서 대중에 공개되지 못했던 작품들을 고화질 디지털 화면으로 선보이는 작업을 꾸준히 지속할 것”이라 말했다. ‘홍길동’은 다음 달 2일 서울 상암동시네마테크KOFA 극장에서 관객을 만난다. 지난 1일부터 열리고 있는 영자원의 연례 기획전 ‘시네마테크KOFA 발굴, 복원 그리고 재창조’ 일환으로, ‘호피와 차돌바위’, 김수정‧임경원 감독의 ‘아기공룡 둘리-얼음별 대모험’(1996)도 상영작에 포함됐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