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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반도체 춘추전국시대와 ‘칩4 동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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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호 31면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 전 외교통상부 장관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 전 외교통상부 장관

미·중 대결이 격화되면서 2차대전 후 자유주의 국제정치경제 질서가 크게 변하고 있다. 자유무역과 다자주의와 같은 기본원칙들은 무너지고, 1980년대 이후 심화되어 온 세계화와 경제통합은 옛말이 되었다. 무역과 투자는 보호, 관리의 대상이 되어가고, 디커플링, 공급망, 산업정책 등이 유행어가 되었다. 핵심 전략산업들이 안보와 정치 논리에 좌우되면서 기업가들은 효율성보다 외교와 지정학 변수에 먼저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다.

반도체가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하는 대표 사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 투자를 “21세기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핵심전략이라고 선언했다. 지난 3월 한국, 일본, 대만과의 반도체 협력을 위한 ‘칩4 동맹’을 제안했고, 5월 방한 시 삼성의 반도체 공장부터 찾았다.

가치, 군사, 경제 분야 동맹에
기술 동맹 더해 중국 압박하는 미국
반도체 전략 수립에 국가 앞날 걸려
‘칩4 동맹’ 참가에 신중한 선택 필요

선데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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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4 동맹’은 중국과 대결하는 미국의 중첩적 네트워크 전략의 화룡점정이다. 1871년 독일 통일을 달성한 재상 비스마르크는 중첩적 동맹 전략으로 유럽외교를 주도하며 숙적 프랑스를 고립시켰다. 서로 앙숙이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독일을 중심으로 묶어내 3제동맹(Three Emperors’ League, 1873~75, 1881~87)을 맺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양자 동맹(1879)에 이탈리아를 추가해 3자동맹(1882)을 구축했고, 3제동맹 와해 후에는 러시아와 또다시 비밀리에 재보장조약(1887)을 체결했다.

그때처럼 미국은 지금 중국을 상대로 쿼드, 오커스(AUKUS, 미국·영국·호주 안보 동맹), 한·미·일 3자협력, 인태경제프레임워크(IPEF), 나토-인도태평양 연계 등을 통해 소다자네트워크들을 중첩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가치, 군사, 경제 분야 동맹에 기술 분야의 ‘칩4 동맹’을 더해 중국을 압박하겠다는 것이다.

반도체는 수많은 첨단산업의 필수 부품이며 동시에 군사안보 전략산업이다. 한국의 최대 수출품목이고, 중국의 최대 수입품목이다. 2021년 반도체 산업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경제 규모는 전 세계 GDP의 40% 이상이라고 한다.

미국은 코로나 팬데믹 당시 반도체 공급 부족과 중국과의 대결 심화에 직면하면서 강한 위기의식을 갖고 반도체의 자국 생산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의 설계에 뛰어나지만 직접 생산은 오랫동안 외국의 파운드리에 의존해왔다. 그 결과 미국 내 반도체 생산은 전 세계 생산의 10%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최첨단 7나노, 5나노미터 수준의 칩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러한 최첨단 칩들은 AI 분야에 대단히 중요한 부품인데 AI 분야는 현대전의 양상을 혁명적으로 바꿀 것이다.

따라서 만일 중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을 앞서거나 미국으로 향하는 최첨단 반도체 공급을 중단시킬 능력이 있다면 전쟁의 모든 영역에서 미국보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것이다. 미국 의회 산하 인공지능국가안보위원회 2021년 최종보고서의 지적이다. 중국이 AI가 장착된 최첨단무기로 공격하면 미국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520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포함한 최첨단 반도체산업 육성법안(CHIPS for America Act)의 의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삼성이나 TSMC와 같은 해외 대기업에게도 미국에 대한 투자를 강력히 요청해왔다.

대만의 TSMC는 세계 최첨단 초미세 칩을 생산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TSMC 때문에 중국이 대만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이른바 ‘실리콘 방패론’이 거론될 정도다.

그런데 TSMC 창설자인 모리스 창의 지난 4월 인터뷰가 흥미롭다. 미국이 대만 반도체 회사의 대규모 미국 투자를 추진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며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미국 오리건 소재 TSMC 공장의 경우 지난 25년간 아무리 노력했어도 대만보다 50% 비용이 더 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말속에는 미국을 자체 생산보다 대만산 첨단반도체 수입에 계속 의존하게 만들어 미국의 대만 방어 의지를 더욱 강화하려는 속내가 담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즉 반도체를 둘러싼 안보게임이 미·중 간뿐만 아니라 우방인 미·대만 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모리스 창은 대만이 향후 계속해서 미·중 양측을 상대로 반도체 비즈니스를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화웨이에 대한 제재에서처럼 결국 미국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칩4 동맹’에의 가입 여부라는 당면 과제에 봉착한 한국에게도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 분야 전문가 권석준 교수는 대중 수출 감소와 그로 인한 생산 비용 증가로 미국, 한국, 대만 등은 엄청난 타격을 받겠지만, 한국은 대체보완 지역을 찾으면서라도 ‘칩4 동맹’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칩4 동맹’을 통해 미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에 적극 참여해야 차세대 반도체 기술인 양자 ICT 기술 분야에서의 공급망에 참여하고 표준과 기술자산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의 춘추전국시대가 진행되고 있다. 국가의 앞날이 걸린 현명한 반도체 전략의 수립과 집행을 위해 어떻게 효율적인 민관학 협업 시스템을 만들지, 시대에 한참 뒤진 철옹성 같은 규제를 어떻게 혁파하여 수천, 수만 명의 반도체 인력을 길러낼지 시급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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