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파일] 엘리자벳은 나만의 것?

중앙선데이

입력 2022.07.0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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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호 31면

유주현 문화부문 기자

유주현 문화부문 기자

뮤지컬 ‘엘리자벳’을 처음 만난 건 1990년대 일본에서다. 9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창작된 이 작품은 96년 일본 다카라즈카 가극단에서 재창작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자유분방한 천성을 가졌지만 갑갑한 황실에서 우울증에 시달렸던 엘리자벳의 일대기를 평생 그림자처럼 맴돌며 진정한 자유를 주겠다고 유혹하는 ‘죽음(토드)’과의 사랑으로 은유한 시적인 무대는 공연미학의 절정이다. 여성들만 나오는 다카라즈카 버전의 주인공은 남장 여배우가 맡는 ‘죽음’인데, 그 오묘한 중성적 매력이 ‘죽음’이라는 초월적 캐릭터를 만나 빚어내는 카리스마는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볼수록 눈길이 가는 건 엘리자벳의 존재감이었다. 여타 다카라즈카 작품에서 ‘남역’에 가려있던 ‘여역’이 무대 중심에 우뚝 선 것이다. 다카라즈카는 독특한 배우 양성 시스템으로 유명한데, 배우가 대기업 정규직처럼 소속되어 주역부터 서브, 앙상블까지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라 캐스팅된다. 브랜드 개념인 5개 조를 각각 상징하는 남역 톱스타의 존재가 절대적인데, 긴 세월 중장년 여성 팬덤으로 지탱되어 왔기 때문이다. 주부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남역 톱스타를 보기 위해 수십 차례 회전문을 돈다.

뮤지컬 ‘엘리자벳’에 2012년 초연부터 출연해온 옥주현. [사진 EMK 뮤지컬 컴퍼니]

뮤지컬 ‘엘리자벳’에 2012년 초연부터 출연해온 옥주현. [사진 EMK 뮤지컬 컴퍼니]

여역이 작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넘버를 부르며 ‘나는 나만의 것’이라 외치는 것이 ‘사건’이었던 이유다. 황제와 시어머니 대공비에게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헤게모니를 잡는 스토리라인 자체도 마치 가부장적 일본사회에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갇혀있던 주부들에게 들고 일어나라고 부추기는 주문 같았다. 연중 마티네 공연으로 주부들이 숨통을 틔우고 집으로 돌아가 가정을 잘 유지하게 만드는 마약같이 달콤한 존재가 다카라즈카였기에, ‘엘리자벳’의 반란은 당시 일본에서 시대적 변화의 상징과도 같았다.

올해 10주년을 맞은 한국판 ‘엘리자벳’ 사태도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주연배우 옥주현이 캐스팅에 개입했다는 일명 ‘옥장판’ 논란에 장안이 들썩였다. 그토록 돋보이는 모든 여배우의 ‘워너비’ 배역인데, 다른 스타급 배우들이 배제되도록 암묵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다. 당사자와 제작사는 거듭 부인했지만, 옥주현이 뮤지컬 판에서 선 넘는 행동을 해 왔다는 것은 업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한 관계자는 “표를 팔면 다 용서되는 게 뮤지컬 판”이라면서 “마니아를 넘어 대중까지 끌어들이려면 인지도를 가진 스타를 앞세울 수밖에 없다”고 푸념했다.

이번 사태로 한국 뮤지컬이 스타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스타의 변화 없이 가능할까. 결국 무대의 감동은 스타가 만든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고스타 옥주현이 독선적 행동을 하는 이유가 “혼자 빛나고 싶어서”라는데, ‘자유’를 외쳤지만 또 다른 속박에 머물렀던 엘리자벳의 인생이 떠오른다. 갑갑한 현실에 유일한 낙이었던 미모에 대한 칭송을 잃지 않으려 중압감에 시달리며 정신병자의 자유로운 영혼을 부러워했다는 게 뮤지컬의 스토리다. 최고스타의 자리를 지키려는 옥주현의 영혼은 자유로울까. 지난해 ‘위키드’ 환불 사태 때도 극도의 스트레스를 고백했던 그다.

사족으로 엉뚱한 발상 하나. 이번 사태로 과거 시즌에서 ‘죽음’ 역에 차지연이 젠더프리 캐스팅 물망에 올랐었다는 사실까지 회자됐는데, 옥주현을 비롯해 ‘죽음’ 역에 그럴싸한 여배우들이 없지 않다. 일본에서 초연배우 이치로 마키를 비롯해 ‘죽음’역 남역들이 다카라즈카 퇴단 후 도호 프로덕션에서 줄줄이 엘리자벳이 됐으니 영 무리한 일도 아니다. 젠더프리야말로 여배우에게 또 다른 자유를 주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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