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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낙태 보완 입법 3년 방치한 국회의 직무유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95호 30면

임신 경험 여성 17.2% 낙태, 연령 낮아져

미국은 대법원 ‘낙태권 폐지’로 갈등 고조

여성 인권과 태아 생명권 논의 시작해야

임신 경험 여성의 17.2%가 낙태한 적이 있다는 그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발표는 낙태가 국민 생활과 밀접한 사안임을 보여준다. 전체 낙태 수가 2018년 조사보다 줄긴 했지만, 평균 연령은 28.4세에서 27세로 낮아졌다(만 15~44세 대상). 낙태 당시 미혼인 사례가 절반이 넘었다.

낙태는 여성인권과 직결된다. 그 때문에 지난달 24일 미국 연방 대법원의 낙태권 폐지 결정은 큰 충격을 줬다. 절반이 넘는 주(26개)에서 사실상 낙태가 금지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영국·프랑스·캐나다 등 선진국의 지도자들은 일제히 우려를 표했다.

미 언론들은 당장 원정 수술을 떠나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낙태가 허용된 주의 병원 목록이 배포되는 실태를 지적했고, 뉴욕타임스는 불법 임신중절 수술이나 알약 밀거래가 성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로 인한 피해는 취약계층 여성에게 집중될 것이다.

한국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 12월까지 국회에 보완 입법을 주문했다. 하지만 국회는 이를 3년째 방치하고 있다. 그 때문에 낙태는 처벌할 법적 근거도, 어디까지 허용할지 명확한 기준도 없는 무법 상태에 놓였다.

낙태는 여전히 음지에서 성행한다. 낙태 약물 유통은 불법이지만, 7.7%가 사용한다. 의료기관, 비용, 부작용 등 꼭 필요한 지식도 전문가 도움을 받기 어렵다. 관련 정보 습득의 주된 경로가 온라인(46.9%)이어서 부정확한 내용들로 건강을 해칠 우려가 크다.

2020년 10월 법무부는 임신 14주까진 임신부의 결정에, 질환·성범죄 등의 경우엔 24주까지 허용하는 개정안을 냈다. 24주는 태아가 모체를 떠나 독자 생존할 수 있는 시기다. 국민의힘에선 이 기간을 더욱 줄이는 법안이, 더불어민주당에선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는 법안이 나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법안을 발의했을 뿐 당과 국회 차원에서 합의점 도출을 위한 논의는 없다.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득표에 도움 되는 법안엔 쌍심지를 켜던 여야가 정작 꼭 필요한 입법엔 손을 놓고 있다.

낙태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결부된 고차원적 가치판단의 문제다. 헌재가 낙태죄를 단순 ‘위헌’이 아니라 ‘헌법불합치’로 결정하고 보완 입법을 주문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충분한 논의로 국민 여론을 수렴하고 여성과 태아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할 방법을 찾으란 뜻이었다. 그런데 헌재가 마련한 1년 8개월의 시간을 국회가 허비하면서 무법 상태가 됐다.

낙태 허용 시점을 정하는 문제 못지않게, 사회경제적 문제로 낙태를 결정하는 이들이 출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가장 많은 낙태 원인이 학업·직장 등 사회활동 지장(35.5%)과 경제 상태(34%)이기 때문이다.

출산하고 싶은데 사회경제적 이유로 낙태하는 경우라면 제도적 지원으로 낙태를 줄일 수 있다. 어떤 환경의 임신이라도 차별받지 않고 국가가 출산과 양육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살릴 수 있는 아기는 살리고, 낙태를 택한 여성은 안전한 의료시스템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합계출산율 0.8명의 초저출산 국가이면서도 이미 임신한 여성과 뱃속의 태아조차 사회경제적 이유로 인간적 존엄이 훼손되는 걸 방치한다면, 앞으로 그 어떤 저출산 극복 대책이 효과가 있겠는가. 여성의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을 최대한 지킬 수 있는 방안을 지금부터 당장 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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