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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대통령의 절반은 영부인 몫, 국정의 한 축 담당해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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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호 16면

콩글리시 인문학

지난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이색적인 손님이 참석했다. 미국 축하사절단 단장인 ‘제2의 신사(Second Gentleman)’ 더글러스 엠호프다. 미국에서 부통령의 부인을 Second Lady로 부르듯 여성 부통령의 남편은 Second Gentleman이라고 한다. 미국 역사상 여성 부통령의 탄생은 이번 해리스가 처음이므로 ‘제2의 신사’도 처음 등장했다. 최신 시사영어사전에도 이 말은 아직 등재돼 있지 않다.

윤 대통령은 선거 캠페인 중에 공약한 대로 영부인(令夫人, First Lady)이란 호칭을 없앴다. 그냥 배우자로 불러 달라고 했다. 그러나 배우자(spouse)는 호칭이 아니고 문서에 쓰는 용어로 아내와 남편을 총칭한다. 그는 영부인을 지원하는 제2부속실도 폐지했다.

김대중 정부는 대통령을 호칭하던 각하라는 용어를 없애고 ‘대통령님’이라고 부르게 했다. 문민정부를 맞아 권위주의를 청산한다는 좋은 취지였지만 공직자들이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아’ 한동안 애를 먹었다. 영어로 대통령을 Mr. President라고 부르는데 우리말로 옮기면 대통령 각하다. 우리가 국회에 가면 국회의원을 무조건 “존경하는 OO의원님”이라고 부르도록 이른다. 그렇지 않으면 국회 모독으로 고발당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각하는 Your Excellency이지만 대통령만 가리키지 않고 총리나 각국 대사를 부를 때도 쓰는 용어다. 영국에서도 의원은 honorable member라고 부르지만 이런 호칭을 비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관례상 대통령 부인은 First Lady이고(미국에서는 주지사 부인도 퍼스트레이디로 부른다) 딸은 First Daughter, 아들은 First Son, 대통령 내외는 First Couple, 일가는 First Family라고 호칭한다. 심지어 대통령이 키우는 개조차 First Dog이 아닌가.

‘공식 일정 없이 조용한 내조’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First Lady는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한다.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Anna Eleanor Roosevelt)는 퍼스트레이디의 표상으로 미국 정치사에 남아 있다. 불행을 기회로 만드는 행복의 연금술사라고 불린 그녀는 적극적인 내조로 장애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4번이나 연임토록 했다. 그녀는 사회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로서 큰 족적을 남겨 미국 역사상 최고의 영부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편 사후에도 국제연합 대사를 지내면서 인종차별 철폐에 앞장섰고 지금까지 인권의 대모로 칭송되고 있다.

소수민족의 인권과 여성 지위 향상 외에도 세상에는 국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다. 소년소녀 가장, 독거노인, 환경보호, 난치병 치료, 도덕성 회복, 다문화 가정 돌보기 등 영부인이 관심을 쏟아야 할 일은 산적해 있다. 국제적으로는 정상 외교의 파트너로서, 때로는 대통령을 대행할 일도 있을 것이다. 미국 36대 대통령 부인 버드 존슨(Bird Johnson)은 환경보호와 도시 재정비 운동에 헌신했고, 39대 대통령 부인 로잘린 카터(Rosalynn Carter)는 만성질환 퇴치, 캄보디아 난민 돕기 등 국제적인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국민 혈세로 값비싼 옷을 사 입고 세계만방 유람 다니는 패셔니스타(fashionista) 같은 영부인을 우리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좋은 세상 만들기에 헌신하는 대통령의 배우자야말로 영부인의 이상이다. 김건희 여사가 이번 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NATO 정상회담에 동행하며 국제무대에 처음 데뷔했다. 성공한 대통령의 절반은 영부인의 몫이다.

김우룡 한국외대 명예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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