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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장 판이 바뀐다]식당·택시·공장·건설 일할 사람 없고, 대기업은 이직 비상…고용주·근로자 갑을관계 역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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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호 08면

SPECIAL REPORT

서울 마포의 한 음식점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 인력난으로 자영업자의 고충이 커지고 있다. [뉴시스]

서울 마포의 한 음식점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 인력난으로 자영업자의 고충이 커지고 있다. [뉴시스]

#경기도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51)씨는 얼마 전 700만원대의 업소용 식기세척기를 새로 구입했다. 설거지 등 주방 관리를 도맡던 직원이 일을 그만둬 새 직원을 뽑고 있지만, 몇 달째 고용하지 못해서다. 김씨는 “꽤 괜찮은 급여 조건을 제시했는데도 같은 조건에 카운터 업무처럼 편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지원자만 몇 명 있었을 뿐”이라며 “주위 자영업자들도 이른바 3D(Dirty·Difficult·Dangerous) 업무를 해줄 직원들의 연쇄 이탈과 새 직원 채용 문제로 애를 먹고 있다”고 전했다.

#수도권의 한 제조 기업 공장에서 일하던 이모(36)씨는 4월 경남 창원의 다른 업체 공장으로 이직했다. 기존의 1.6배에 달하는 연봉을 보장해준다는 기업 측 제의를 수락했다. 이씨는 “근무지가 너무 멀고 연고도 없어 고민했지만 사택 제공을 기본으로 하는 파격적인 급여 제시를 뿌리칠 수 없었다”며 “내가 맡은 일이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긴 하지만 전문직도 아닌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우대로 이직하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역 내 다른 공장들에서도 인력난이 심각하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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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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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높은 연봉만 제시한 회사엔 인재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이나 복리후생까지 눈에 띄게 좋아야 비로소 관심을 보여서 전체의 절반 정도인 중소 규모 고객사들이 애를 먹고 있어요.” 고객사 다수가 경기도 판교테크노밸리에 있는 한 헤드헌팅 업체 대표의 말이다. 성장산업 중심지로 떠오른 판교엔 네이버·카카오 등 정보기술(IT) 기업 1200여 곳이 있고 이들 기업에서 약 40만 명의 임직원이 일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개발자 기근 현상에 파격적인 연봉 제시로 경쟁사 인력 모시기에 나섰다. 그럼에도 충원이 쉽지 않아 스톡옵션과 재택근무 보장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사활을 걸고 있다. 거꾸로 개발자들은 이직 조건을 꼼꼼히 따져가며 최상의 결과를 얻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지 2년여가 지난 지금, 전국 곳곳의 노동시장 ‘판’이 바뀌고 있다. 핵심은 고용주와 근로자의 뒤바뀐 갑을(甲乙) 관계다. 고용주들은 일손이 턱없이 모자란 상황에서 근로자 모시기에 나섰음에도 여의치 않아 고민이 깊다. 거꾸로 근로자들은 각 고용주가 내세운 더 좋은 조건 여럿을 저울질하면서 과거보다 훨씬 유리하게 새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상황이다. 특히 식당·카페·택시 등 대표적인 서비스 업종, 중소 규모 공장과 건설 현장, 농촌 등에선 일손 수요에 비해 공급이 태부족한 인력난에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가 급증했다.

빈 일자리 1년 새 7만9000개 늘어

각종 통계로도 드러난다. 고용노동부 조사 자료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의 평균 미충원율과 전체 미충원인원은 팬데믹 이전인 2019년 하반기만 해도 각각 11.1%, 7만4000명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숫자가 지난해는 14.2%, 11만4000명으로 껑충 뛰었다. 고용주들은 미충원 사유로 ‘임금 등 근로 조건이 구직자 기대에 맞지 않아서’를 가장 많이(23.3%) 꼽았다. ‘구직자 기피 직종인 때문’이라는 응답도 12.3%였다. 이 같은 설문 응답 내용, 그리고 조사 대상 사업체 중 직원 수가 300인 미만인 곳이 전체의 90%대였단 점을 고려하면 영세한 업장일수록 구인난이 심각함이 여실히 나타난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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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300인 미만 사업체의 평균 인력부족률은 2020년 상반기 2.0%에서 지난해 하반기 3.1%로 치솟았다. 이에 전국의 비어있는 일자리 숫자는 올 1월 21만6000개에 달했다. 2020년 1분기엔 그 60% 수준인 13만7000개였다. 그런데 이는 중소기업들만 겪고 있는 현상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덜한 수준이지만 대기업들도 팬데믹 이전보다 구인난을 겪고 있다. 한국CXO연구소에 따르면 조사 대상 대기업집단 76곳 중 25곳은 지난해 직원 수가 2020년보다 감소했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장은 “대기업들이 신규 채용을 늘리고 있지만 기존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는 경우도 많아 실질적 고용 규모는 크게 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용부도 2020년 상반기 1.0%였던 300인 이상 사업체 인력부족률이 지난해 하반기 1.4%로 오른 것으로 집계했다. 또 고용부에 따르면 올 1분기 기업들의 구인 인원은 130만3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3만7000명(22.3%) 늘었다. 기업들의 2~3분기 채용 계획 인원도 65만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만9000명(50.8%) 증가했다. 지난달 28일 이를 발표한 권태성 고용부 고용지원정책관은 “기업들의 인력 부족이 점점 심화하고 있다”며 “일부 직종에선 인력이 진짜(많이) 부족해서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노동시장 분위기가 크게 바뀐 이유가 뭘까. 우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잔뜩 움츠러들었던 소비시장이 빠른 백신 보급과 접종 확대에 따른 경기 개선으로 지난해 분위기 반전에 성공한 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제조·서비스 수요가 나란히 급증했으니 일자리 숫자도 사업체 규모를 막론하고 늘어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서비스 시장의 근간 일자리인 아르바이트(알바)만 봐도 올 3월 채용 공고 숫자가 2020년 3월 대비 216.7% 급증했다(알바천국 집계).

근로자 입장에선 기존 일을 그만두고 더 좋은 조건의 업장으로 향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어진 셈이다. 약 3년간 대형 카페에서 서빙을 하다가 지난해 말 푸드 관련 스타트업 사무직으로 자리를 옮긴 홍선영(27·가명)씨도 이런 경우다. 홍씨는 “홀 서빙 알바는 계속 서서 일하는 데 따른 피로감과 다양한 손님들을 상대하면서 얻는 스트레스가 심하지만 (급여 등의) 처우는 좋지 않은 편”이라며 “다른 일을 할지 고민하던 차에 최근 새 일자리 구하는 게 크게 어렵지 않더라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경험담과, 스타트업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해서 면접 때 현장 경험을 어필한 게 이직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홍씨 같은 젊은 세대는 안 그래도 판이 바뀐 고용시장에서 더욱 고용주 대비 우위를 점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음식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인기에 배달 라이더라는 새로운 유망 일자리가 부각된 게 하나의 요인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초부터 배달 라이더로 일하고 있는 김진우(30)씨는 “식당 등에서 일하면 근무시간 동안 (업장에) 몸이 늘 묶여있어야 하지만 배달 라이더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자유로이 일할 수 있어서 몸과 마음이 편하다”며 “심지어 돈도 더 많이 번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20대와 30대 ‘MZ세대’의 라이프스타일에 잘 맞는 일자리라는 설명이다. 김씨 같은 현직자들 경험담이 호응을 얻으면서 2019년 34만9000명이던 국내 배달원 수는 지난해 42만8000명까지 급증했다.

농촌 하루 일당 17만원까지 치솟아

구조적으로는 인구 고령화와 수도권 집중 현상(과밀화), 외국인 근로자 수 감소 등이 전체 세대 인력난의 배경으로 지적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15~29세 인구는 2019년 907만3000명에서 지난해 879만9000명으로 감소세가 뚜렷하다. 이런 가운데 2019년 서울과 경기 인구가 나라 전체 인구의 50%를 넘어서면서 사상 첫 비수도권 인구를 추월했다.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과 농촌일수록 일손 부족에 시달릴 공산이 한층 커진 것이다. 농촌의 경우 주요 작물 수확 시기엔 일당 16만~17만원을 제시해도 근로자를 구하기 어렵단 얘기가 지난해 각지 농가들을 통해 쏟아졌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2020년만 해도 일당 11만~12만원 수준이었지만 지역 내 내국인이 급감한 데다 외국인 근로자까지 대거 빠져나가면서 인력난이 심화된 탓이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팬데믹을 계기로 귀향하거나 입국하지 않은 경우가 적잖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외국인 근로자 역시 3D 업종 종사를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방문취업(H-2) 비자나 비전문취업(E-9) 비자 등 중소 제조 기업, 단순 노무 분야 등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국내에 체류한 외국인이 지난해 상반기에 2020년 상반기보다 약 23%(H-2), 14%(E-9) 각각 줄어든 게 이를 방증한다는 분석이다. 같은 기간 유학생 및 재외동포(F-4) 비자 발급은 4% 늘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에서 내국인이 힘든 일을 기피하고 있는 것처럼, 세대교체가 된 외국인 근로자들도 상대적으로 편한 일을 찾는 경향이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며 “제조업 전반의 인력난이 심화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외에 급여나 복리후생 등 근로 조건에서 중소기업보다 월등히 좋은 대기업들은 활발한 이직으로 인력난을 겪고 있다. 팬데믹 이후 IT 업종 전반의 폭발적 성장으로 개발자 수요가 급증하면서 기업 간 인재 유치 경쟁에 불이 붙은 게 대표적 사례다. 10대 그룹의 한 인사 담당자는 “임금 인상 요구를 사측이 거절하면 바로 사표를 내고 회사를 옮기는 사례가 늘어 전체 직원 급여를 대폭 높이는 식으로 대응 중”이라며 “당분간 이런 분위기가 이어질 것 같다”고 전했다.

이 인사 담당자는 “전사적으로 ‘개발자는 우대하면서 왜 우린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높아져 거의 모든 직군에서 노무 관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다른 대기업들의 도미노 임금 인상 추세도 어느 정도 따라가야 하는 부분이라 고민이 깊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가 노사 협의를 통해 직원 임금 인상률을 지난해 7.5%, 올해 9.0%로 정하는 등, 주요 대기업은 대대적 임금 인상으로 인력 이탈 방지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정부는 이런 추세를 일부 우려 중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한국경영자총협회 간담회에서 “일부 대기업이 경쟁적으로 임금 상승을 주도하고 있다”며 “과도한 임금 인상은 고(高)물가 상황을 심화시키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를 더욱 확대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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