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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만 하나… 아재도 같이 하자, 스포츠클라이밍

중앙일보

입력

서울시장기 대회 장년부 출전해 보니

65.4→64.4→63.9㎏. 지난달 11일, 15일, 18일의 기자의 체중 변화다. 일주일새 1.5kg을 뺐다. 하지만 이 숫자는 지나보니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4위 하신, 저보다 나이가 한참

위인 분에게 제 메달을 양보하고 싶어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요.” 3위를 한 어느 선수가 한 이 말이 더 중요했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그리고 기자는 왜 체중을 줄였을까. 지난달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서 벌어진 작고도 유쾌한 소란 때문이었다.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대회(서울 대회)였다. 기자가 이 대회에 선수로 참가했다. ‘스포츠클라이밍대회 출전기’를 적는다.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장년부 리드 종목에 참가한 선계화 씨가 등반하고 있다. 정준희 기자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장년부 리드 종목에 참가한 선계화 씨가 등반하고 있다. 정준희 기자

“가자, 가자.”

10대부터 60대까지, 그러니까 아이들과 아재·아지매들이 서로를 응원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고무신처럼 생긴 암벽화를 신고 은평인공암벽장 가파른, 심지어 130도까지 꺾인 구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서울 대회는 서울시 대표 선수 선발전과 동호인 대회를 겸했다. 그런데 동호인 부문 중에서 눈에 띄는 분야가 있다. 참가 가능 연령 하한선을 둔 ‘장년부’ 경기다. 1971년생 이상만 참가할 수 있는, 시쳇말로 ‘아저씨·아줌마’ 경기다.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참가자들이 경기 전 몸을 풀고 있다. 대회 참가자들은 루트를 연구할 수 없게 자신의 순서 때까지 대기실에 격리돼 기다리다 경기를 치르게 된다. 정준희 기자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참가자들이 경기 전 몸을 풀고 있다. 대회 참가자들은 루트를 연구할 수 없게 자신의 순서 때까지 대기실에 격리돼 기다리다 경기를 치르게 된다. 정준희 기자

# 아저씨·아줌마를 위한 장년부 경기

대회가 열린 같은 주말에 경기도 안산, 전북 전주에서도 스포츠클라이밍대회가 열렸다. 동호인을 대상으로 경기가 열린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퍼진 이후 3년 여 만이다. 때문에 서울시산악연맹·경기도산악연맹·전주시산악연맹 등 3개 대회 주최 측에서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참가자들이 적을까봐 고심했단다. 3개 대회 일정이 겹친 것도 고심을 더하게 했다. 그래서 대회 관계자들은 알음알음으로 산악회, 스포츠클라이밍 트레이닝 센터 등에 연락을 했다고 한다. 세 개 대회에서는 초등학생부터 70대까지, 400여 명이 대회에 참가했고 관중 1500명이 모였다. 서우석 서울시산악연맹 사무국장은 “코로나19 거리두기가 해제된 뒤 3년 만에 열린 동호인 대회”라며 “동호인들이 2년간 굶주려 있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참가자들이 등반 중인 동료를 응원하고 있다. 정준희 기자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참가자들이 등반 중인 동료를 응원하고 있다. 정준희 기자

자연암벽 등반과 달리, 스포츠클라이밍 역사는 짧다. 1971년 소련에서 첫 인공암벽 대회가 열렸다. 한국에서는 1987년 서울시 서초동에 위치한 장비점 ‘살레와’에 처음 인공암벽장이 생겼고 1990년에 첫 대회가 개최됐다. 현재 전국의 인공암벽장은 600여 곳. 국내 스포츠클라이밍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추산한다. 2030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지는 추세다.

2030은 주말 나들이 장소로 스포츠클라이밍 센터를 꼽는다. 경기도 고양시의 한 실내 스포츠클라이밍센터에서 만난 석정근(37)씨는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 사서 친구들과 하루 종일 놀다가 간다”고 밝혔다. 이들의 ‘필수 등반장비’에는 삼각대가 있다. 스마트폰을 고정시키고 끼우고 자신의 등반 장면을 찍고 소셜미디어(SNS)로 공유한다.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장년부 리드 종목에 참가한 오은정 씨가 등반하고 있다. 오씨는 장년부 1위에 올랐다. 정준희 기자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장년부 리드 종목에 참가한 오은정 씨가 등반하고 있다. 오씨는 장년부 1위에 올랐다. 정준희 기자

스포츠클라이밍은 2020 도쿄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이 됐다. 도쿄올림픽에서는 리드·볼더링·스피드 세 분야의 점수를 합산해 순위를 매겼다. 볼더링은 4.5m 높이의 암벽에 문제 풀이 식으로 설치된 다양한 인공 구조물(홀드)을 로프 없이 4분 이내에 통과하는 종목이다. 리드는 하네스(안전벨트)·로프 등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15m 높이의 인공 암벽에 세팅된 문제를 풀며 잡고 6분 이내에 가장 높이 오르는 종목이다. 스피드는 안전용 로프를 착용하고 15m 높이에 95도 경사면의 인공 암벽을 누가 더 빠르게 올라가느냐를 겨룬다.

그런데 세대별로 이 종목 선호도가 다르다. 순간적인 파워가 필요한 볼더링과 스피드는 10대~30대가, 지구력이 필요한 리드는 40대 이상이 선호한다. 이번 서울대회에서 리드·스피드 두 종목이 열렸는데, 동호인들은 리드에만 출전 가능했다.

지난 1주일간 우리나라 1세대 스포츠클라이밍 선수였던 조규복(56) 전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팀 감독은 고민에 고민을 했다. 그는 이번 서울 대회 루트 세터다. 스포츠클라이밍 루트 세터는 선수들의 창조적인 동작을 유도하는, 이른바 ‘문제’를 인공암벽에 세팅한다. 국내·국제(아시아·세계) 공인 자격증이 있다. 조 전 감독은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IFSC) 아시아 루트 세터다. 루트 세터가 ‘문제’를 내면, 서채현·천종원 선수가 ‘문제 풀이’에 나서는 식으로 대회가 치러진다. 그는 “1주일 전부터 인공 암벽에 세팅할 홀드를, 전혀 보지 못한 신형으로, 1000만원 어치 구매했다”며 “5일간 대회 장소를 폐쇄하고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한 채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동호인 일반부 리드 종목 결선에서 정은섭씨가 등반하고 있다. 정씨는 일반부 2위에 올랐다. 동호인 일반부와 장년부 결선은 같은 루트에서 펼쳐졌다. 정준희 기자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동호인 일반부 리드 종목 결선에서 정은섭씨가 등반하고 있다. 정씨는 일반부 2위에 올랐다. 동호인 일반부와 장년부 결선은 같은 루트에서 펼쳐졌다. 정준희 기자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동호인 일반부 리드 종목 결선에서 정은섭씨가 등반하고 있다. 정준희 기자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동호인 일반부 리드 종목 결선에서 정은섭씨가 등반하고 있다. 정준희 기자

# 장년부 수준 높아 여자 엘리트와 루트 바꿔

지난달 18일 장년부 예선전. 5일간 15m 길이의 현수막으로 가려졌던 문제가 드러났다. 선수들은 문제를 보고 머릿속으로 문제 풀이를 했다. 그리고 수화를 하듯, 손으로도 동작을 짜내고 있었다. 6분간 주어진 이 루트 파인딩(route finding) 시간 뒤 선수들은 격리됐다. 다른 선수의 실제 문제 풀이를 볼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 번의 눈길로, 한 번에 올라야 하는 온 사이트(onsight) 방식이었다.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참가자들이 루트가 공개되자 머릿속으로 코스를 공략하는 '루트 파인딩' 시간을 가지고 있다. 대회 참가자들은 짧은 시간 동안 루트를 본 후 자신의 순서 때까지 대기실에 격리돼 기다리다 경기를 치르게 된다. 정준희 기자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참가자들이 루트가 공개되자 머릿속으로 코스를 공략하는 '루트 파인딩' 시간을 가지고 있다. 대회 참가자들은 짧은 시간 동안 루트를 본 후 자신의 순서 때까지 대기실에 격리돼 기다리다 경기를 치르게 된다. 정준희 기자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참가자들이 루트가 공개되자 쌍안경으로 홀드를 보며 머릿속으로 코스를 공략하는 '루트 파인딩' 시간을 가지고 있다. 대회 참가자들은 짧은 시간 동안 루트를 본 후 자신의 순서 때까지 대기실에 격리돼 기다리다 경기를 치르게 된다. 정준희 기자

지난 6월 18일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인공암벽장에서 제25회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참가자들이 루트가 공개되자 쌍안경으로 홀드를 보며 머릿속으로 코스를 공략하는 '루트 파인딩' 시간을 가지고 있다. 대회 참가자들은 짧은 시간 동안 루트를 본 후 자신의 순서 때까지 대기실에 격리돼 기다리다 경기를 치르게 된다. 정준희 기자

“출발.” 추락 시 내 로프를 잡아줄 대회 관계자에게 등반을 시작한다는 공용어로 소통했다. 국제적으로는 “클라임 온” “클라이밍”이라고 하면 된다.

초록색 홀드의 문제는 초록도마뱀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섰다. 고빗사위, 즉 크럭스(crux) 두 곳을 지날 때 환호가 터졌다. 그러다가 ‘아’ 소리가 나왔다. 동작을 풀고 조이기를 반복했다.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 몸을 날렸다. 턱없이 짧은 비약은 긴 추락으로 이어졌다. 그나마 몸을 날렸기에 ‘+’ 점수가 주어졌다. 4위로 결선에 올랐다. 한 명을 제치면 메달 순위권이었다.

장년부 예선이 끝나자 대회 본부석이 술렁거렸다. 조규복 감독은 대회 뒤 “장년부 선수들 기량이 예상보다 높아서 이미 세팅한 결선 문제로 변별력이 없을 것 같다는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라며 “솔직히 당황스러웠다”고 밝혔다. 보통 루트 완등자는 많아야 2명이 나와야 적당한 수준으로 평가 받는다. 조 감독의 선택은 남자 장년부 결선 루트와 여자 학생부 결선 루트를 바꾸는 것. 남자 장년부 결선 루트는 미세한 움직임으로 130도 오버행 구간을 넘어서야 하는 루트로 업그레이드 됐다.

장년부 결선. 다시 6분간의 루트파인딩 시간. 숲속 마녀의 파란 혀처럼 홀드들이 날름거렸다. 19번째 홀드. 파란 혀는 기자의 몸을 칭칭 감았고 더 이상 상승을 허락하지 않았다. 몸은 긴 반원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선 4위 올라가 최종 3위를 노리던 기자는, 오히려 한 계단 추락한 5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김홍준 기자가 지난 6월 18일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대회 장년부 결승에 출전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김홍준 기자가 지난 6월 18일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대회 장년부 결승에 출전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남자 장년부 우승은 조만간 ‘공식 노인’이 되는 64세 최효식(마운틴스타)씨가 차지했다. 서울 대회 최고령 선수였다. 최씨는 “장년부 대회는 일종의 사명감으로 나오는데, 참가 인원이 적어 대회 자체가 사라져 버리면 안 된다”며 “엘리트 선수보다 파워와 기술이 현격히 떨어지지만, 4060세대를 위한 대회가 지속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꼭 우승하겠다고 벼른 것도 아니고, 재미있게 놀다가 덤으로 1위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 3위 입상자 “많이 노력한 4위에 내 메달 주고 싶다”
장년부 대회 출전자 중 기자만 순위에 연연했는지 모른다. 남편 몰래 대회에 출전했다는 이모(56, 서울 노원구)씨는 “16년째 기회 있을 때마다 장년부 대회에 출전해 왔다”며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가면 하루 참 잘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 장년부 대회에 처음 출전한 김리원(50·오름세등반클럽)씨는 “목표가 퀵드로우 3개였는데, 4개나 통과해서 내가 나한테 놀랐다”며 “다음에는 5개로 목표를 올려볼 것”이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선계화(52·타올라클라이밍클럽)씨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바닥을 친 상태인데, 순위야 어떻든 내 자신을 끌어올리고 싶어서 참가하게 됐다”고 밝혔다. 4060 아저씨·아줌마들은 도전과 용기, 격려와 배려, 위로와 힐링을 위해 장년부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다.
지난 6월 18일 열린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대회 스피드 종목. 김홍준 기자

지난 6월 18일 열린 서울특별시장기 스포츠클라이밍대회 스피드 종목. 김홍준 기자

여자 장년부 3위에 오른 오미경(50·타이거볼드짐)씨는 “4위에 오른 선배님에게 내 메달을 주고 싶다. 60세 안팎의 나이에 그렇게 한다는 건, 피나는 노력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울 대회는 4060 A세대의 경기와 2030 MZ세대의 경기가 동시에 열렸다. 동호인과 엘리트, 장년부와 일반부로 나뉘었지만,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스포츠를 하니 세대 구분으로 굳이 칸막이를 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동호인 일반부 2위에 오른 정은섭(수리클라이밍클럽)씨가 대회 뒤 말했다. “너도나도 즐겁게 같이 하는 겁니다. 나이가 뭐라고, 순위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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