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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장 판이 바뀐다]일손 모자라 연봉 인상 행진, 임금발 인플레 악순환 우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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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호 10면

SPECIAL REPORT 

지난달 23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과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한국공무원노동조합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임금인상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지난달 23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과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한국공무원노동조합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임금인상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9.2%. 한국경제연구원이 집계한 국내 매출액 상위 100개 대기업의 지난해 임직원 연봉 상승률 평균치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인재 부족 여파에 이들 기업들은 급여를 가파르게 올렸다. 반도체와 정보기술(IT), 배터리는 물론 자동차와 화학 등 대기업들이 다수 포진한 업종에서 원하는 인재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자 경쟁적으로 연봉 인상에 나선 것이다. 과거와 달리 즉각적인 보상에 민감한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들의 반응도 임금 인상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SK하이닉스에서 불거진 성과급 책정 논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SK하이닉스의 4년차 직원은 사내게시판과 이메일 등을 통해 “성과급 산정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요청했고, 사측은 제도 개선을 약속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100개 대기업 작년 연봉 상승률 9.2%

기업들의 연봉 상승 행보는 올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 노사협의회에서 올해 평균 임금 인상률을 9%로 합의했다. 최근 10년 내 최대 상승폭이다. LG전자도 평균 8.2% 올리기로 했다. 카카오와 네이버는 각각 평균 15%와 10%의 임금 인상(전체 연봉 재원 기준)을 결정했다. 기업들이 이처럼 가파르게 임금 인상에 나선 이유는 뭘까.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에서 대기업들이 원하는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임금 인상이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용노동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5월 취업자 수는 2848만5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3만5000명 증가했다.

반면 실업자 수는 88만900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25만9000명 줄었다. 실업률은 3%(구직단념자 제외)로 구직·이직 등 직업 탐색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마찰적 실업 등을 제외하고 수치만 놓고 보면 완전고용 수준이라는 평가다. 최근 물가 상승 흐름에 맞춰 노동계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지난 2월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최근 물가상승률이 10여 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하는 상황이라 생계비 보전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밝히고, 올해 임금 인상 요구율을 8.5%로 제시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도 내부적으로 10%를 요구하기로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인석 중앙대 교수(경영학)는 “경험적으로 보면 요즘 같은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생활비가 올라가니 노동계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게 합리적이나 인플레이션 측면에선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1970년대처럼 장기 인플레이션으로 가지 않으려면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할 수 있도록 물가상승률이 떨어질 것이란 공감대가 퍼지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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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기업들의 임금 인상 행보 속에 임금 인상이 또 다시 물가를 끌어올리는 임금발 인플레이션 우려는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다. 임금 인상이 기업들의 인건비 증가로 이어지고, 이렇게 늘어난 비용은 제품과 서비스 가격에 전가돼 물가를 상승시키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얘기다. 노동시장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크리스토퍼 피서라이즈 영국 런던정경대 교수는 최근 CNBC와의 인터뷰에서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스파이럴 현상이 본격화하면 인플레이션을 잠재우는 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인플레이션 시기에 임금 인상의 위험성을 설명했다. 한국은행은 지난 5월 발표한 ‘최근 노동시장 내 임금 상승 압력 평가 및 시사점’ 보고서에서 “물가 상승률이 높은 시기에 노동 비용이 더욱 쉽게 물가에 전가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물가 상승→임금 상승→물가 추가 상승의 악순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중소기업 31% “연봉 동결하거나 삭감”

임금발 인플레이션의 더 큰 문제는 기업 규모에 따라 임금 격차가 더욱 벌어지면서 소득불균형이 심해진다는 점이다. 이미 지난해 기준으로도 전체 상용직 근로자의 연봉 상승률 평균치는 4.6%로 대기업의 절반이었다. 급여 차이도 비슷한 모습이다. 고용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 1월 기준 월평균 임금의 대기업(924만8000원)과 중소기업(382만2000원)의 차이는 2.4배로 전년 동기(2배) 대비 확대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봉 인상이 물가상승률에 미치지 못하는 중소기업 재직자들은 인플레이션에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중소기업 근로자들은 연봉 인상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구인구직 플랫폼 업체인 사람인이 올 초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 513곳 가운데 31.4%가 “올해 임직원 연봉을 동결하거나 삭감할 것”이라 응답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임금상승 요구는 기업의 생산성에 따라 받아들일 수 있는 차이가 있다”며 “기업 생산성 향상과 상관없는 임금 인상 분위기가 기업 전반으로 퍼지면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지고 일자리 창출이 저하돼 한국 경제에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에선 이례적으로 대기업의 임금 인상 자제를 요청하고 나섰다. 지난달 28일 한국경영자총협회와 만난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과도한 임금인상은 물가상승을 심화시키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를 더욱 벌려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킬 우려가 있다”면서 “경영계가 임금 인상을 자제해 적정 수준으로 임금을 인상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정부의 임금 인상 자제 요청이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전문가들은 경제 환경의 변화 없이는 임금 인상 요구가 잦아들기 쉽지 않을 것이라 입을 모은다. 조동철 KDI 정책대학원 교수는 “누구나 경제에 타격을 주지 않고 인플레이션을 잡길 원하지만 그럴 방법은 없다”며 “경제가 힘들어지더라도 결국은 인플레이션이 잡힐 것이라 분위기가 형성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신인석 교수는 “물가가 오르니 우리도 임금을 올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지면 기대인플레이션 상승을 용인하는 분위기로 갈 수 있고 물가상승이 지속될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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