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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물리치는 용감한 기사? 전혀 다른 정보라식 공주 이야기[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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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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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왕 
정보라 지음
아작

여기 높은 탑 속에 공주가, 공주를 지키는 용이, 산 넘고 바다 건너 용감하게 탑에 오른 기사가 있다. 서양의 고전적 서사대로라면 기사는 용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 정보라의 세계에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기사는 공주의 구원자가 아니고, 용은 공주의 납치범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공주는 누군가 도와주기를 수긋이 기다리기에는 말투부터 꽤 껄렁하다. 비록 먼 나라 왕자와 정략결혼을 하는 현실을 벗어날 순 없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고전 서사를 거울에 비추듯 곧이곧대로 뒤집는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는 공주, 기사, 용은 물론이려니와 악역이라고 할만한 왕비나 어린애 같은 왕자 등 저마다 충분한 서사를 안겨준다. 결말 역시 주인공은 행복해지고 악인은 일제히 벌을 받는 대신 저마다 잔혹한 시련을 거치되 각자 나름의 해피엔딩이라고도 할만한 지점에 이른다.

'저주토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 작가. '여자들의 왕'은 이후 새로 나온 소설집이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저주토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 작가. '여자들의 왕'은 이후 새로 나온 소설집이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정보라 작가가 새로 펴낸 소설집 『여자들의 왕』에 실린 단편은 모두 7편. 제일 첫머리는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 등 이른바 '공주, 기사, 용'의 3부작이다. 세 편이 순서대로 이야기가 연결되는 점에서 사실상 한 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비롯해 이 소설집은 "주로 남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틀에 박힌 형태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꾼 작품들"('작가의 말'에서)을 모았다. 대표적으로 '여자들의 왕'은 칼을 휘두르고 피를 흘리며 권력 다툼을 벌이는 주역이 모두 여성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야기의 "틀에 박힌 형태"다. 바뀐 건 주인공의 성별만이 아니다. 작품마다 익숙한 서사의 전형적이고 예측 가능한 틀을 훌쩍 벗어나는 전개가 두드러진다. 예컨대 '사막의 빛'에서 술탄의 선물로 팔려간 가난한 소녀의 운명은 흔히 예상하는 비극이 아니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여자들도 상상의 주인공이자 중심이 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상상의 중심을 여성으로 옮기면 이야기가 훨씬 더 재미있어진다." 세상은 넓고 상상할 것은 많다는 걸 실감하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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