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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고인돌이 즐비한 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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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재를 만들어주세요.” 꽤 오래 전 내게 주택 설계를 의뢰했던 건축주의 요청이었다. 서재는 중년 남성의 공간적 로망이다. 실제로 거기 들어가 책 읽고 공부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눈앞에서 얼쩡거려도 혼나고, 안 보이면 더 혼난다는 중년 남편의 도피처일 수 있다. 그러나 일상 대화 속의 ‘내 서재’라는 단어는 그가 이룬 성취의 과시일 것이다. 우리는 그걸 과시적 공간이라고 불러야 하겠다.

베블런(Thorstein Veblen)이 지적한 저 ‘과시적 소비’는 내밀한 집단심리를 어찌 그리 적확히 짚어낸 것인지 여전히 감탄스럽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잉여소비. 그 과시의 출발점은 몸이겠다. 중국 전통 풍속화를 잘 들여다보면 관리들의 배가 불룩하다. 궁핍하던 시절의 복부비만은 지위과시의 표현이었겠다. 여전히 멀고 가까운 지구 곳곳에서 복부비만은 과시의 도구다.

과시재로 변모한 아파트 단지
점유 공간으로 사회적 지위 표현
과다한 건설은 지자체장의 과시욕
건물보다 중요한 과시재는 얼굴

우리도 비만아를 우량아라 선발하고 복부비만을 배사장이라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절대 궁핍의 극복 이후에 비만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지금은 오히려 날씬하고 탄탄한 몸매가 자본·시간의 잉여와 성실성을 표현한다. 그러나 몸매의 유지는 가장 저렴한 과시에 속한다.

과시적 소비의 정점에 있는 것은 집이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군지 보여준다. 이 문장이 공간과시의 메시지인데 그 역사 또한 고인돌 시대부터 유서 깊다. 조선 시대에는 집권한 노론 가문들이 살던 동네가 따로 있었고 그 흔적은 대한민국 시대까지 수화기 너머의 첫 문장으로 살아남았다. “예, 가회동입니다.” 그 지역은 평창동·성북동을 지나 강을 건넜다. 주소를 길이름 체계로 바꾸겠다고 했을 때 가장 심하게 반대했던 동네는 압구정동·청담동과 같은 강남의 핵심지였다. 지하철 성내역·신천역이 잠실나루역·잠실새내역으로 유장하게 개명된 것도 모두 호명 방식에 의한 공간가치 획득 전략이었다.

공간 중에서 엉뚱하게 특별한 과시재로 변모 등장한 것이 아파트 단지다. 아파트 단지 출입구의 모습 변화가 그 인식 변화를 웅변한다. 80년대 전후에 건립된 아파트 단지들은 그냥 거주공간이었고 출입구에는 덤덤한 명패가 붙었다. 그러나 재건축으로 다음 세대의 아파트가 지어졌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달라진 사회적 지위를 과시했다. 우선 출입구 기둥 위에 고인돌처럼 거대한 수평부재가 올려졌다. 그리고 거기 현란한 아파트 이름이 새겨졌다. 콘크리트 덩어리인데 공원이라 하고, 시민들이 사는 데 귀족인 척하고, 한국어로 말하는데 서양말을 흉내냈다. 그건 명패가 아니었고 누구나 선망하지만 아무나 입주할 수는 없다는 광고 문장의 우렁찬 낭독이었다.

처음의 아파트 단지 주차장은 지상에 있어서 사람과 자동차가 같은 출입구로 드나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아파트에 지하주차장이 건립되면서 보행인과 자동차의 출입구가 구분되기 시작했다. 고인돌 건립지는 자동차 출입구가 선택되었다. 아파트보다 먼저 과시재로 자리잡았던 게 자동차다. 자동차와 아파트의 결합지에서 입주자의 자부심을 촉발하고 방문자의 선망을 촉구하는 게 당연했다.

집은 가장 큰 재원을 투자해 확보하는 재산이니 과시재가 될만하다. 그러나 아파트보다 훨씬 얻기 어려운 과시재가 있다. 의도에 의해 드러나는 게 아니므로 과시보다는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건 얼굴이다. 비유로서의 얼굴이 아니고 실제 사람의 얼굴이다. 이 과시는 구매가 가능한 자동차나 아파트와 차원이 다르다. 암호화폐 투자로 돈을 벌어 비싼 아파트에 입주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얼굴은 축적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리며 지금 사는 곳과 관련 없이 그간의 인생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놀랍게 정직하다. 중년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허투루 나온 것이 아니다.

도시의 얼굴이 건물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도시의 얼굴은 시민들의 얼굴이다. 크고 화려한 건물 사이에 슬프고 화난 얼굴의 시민들이 보인다면 그 도시는 여전히 비루하고 어둡다. 낯선 자를 미소의 얼굴로 환대할 수 있는 도시, 그 도시가 아름답다. 출신·장애·종교·성적정체성 등의 사유로 차별받지 않는 그런 도시다. 건물은 사람을 담아내는 그릇일 뿐이다. 그러나 그릇부터 화끈하게 만들어 도시를 밝히겠다는 지자체장들이 항상 위험하다. 그들이 세우고자 하는 것은 자기 치적의 물적 과시재일 뿐이니 결국 배제와 차별의 도구다. 생존의 공간을 빼앗겨 애통해하는 눈물이 어딘가 고여있는 한 그 도시는 아름다울 수 없다. 과시가 생존을 짓누르는 순간 도시는 가치관 상 고인돌 시대로 회귀하곤 한다.

내게 서재를 의뢰했던 건축주의 이야기다. 요구와 달리 그의 얼굴은 굳이 서재가 필요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래서 그 예산으로 아이들 방을 제대로 만들어주자고 정중히 설득했고 동의가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과연 사이좋은 형제들로 자랐고 그 우애가 이미 그들의 얼굴에 표현되어 있다는 게 신기하다. 이들이야말로 더 자라 분가하면 정말 서재가 필요한 어른들이 될 것 같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