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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태풍 앞에서 마당 쓰는 물가 대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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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늘(7월 1일)부터 유류세가 더 내려간다. 지난해 11월 20%, 올 5월 30%를 낮췄는데, 이번엔 37% 인하다. 더 낮추려면 법을 고쳐야 한다. 이참에 탄력세인 유류세율의 인하 한도를 아예 50%로 확대하자는 주장도 여당 일각에서 나온다. 기름값을 내리는 게 반갑긴 한데 찜찜한 구석이 있다.

우선 세수 감소. 올 5월까지 거둬들인 교통세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조6000억원 감소했다. 유류세 인하 확대로 올 하반기엔 5조원 정도 더 줄게 생겼다. 지난해 경기 회복으로 법인세와 소득세가 늘어 큰 걱정은 없다지만 고유가 행진이 계속되면 곳간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둘째, 계층 간 정의. 소득 상위 10% 계층은 하위 10%에 비해 자동차 연료비를 10배 정도 더 쓴다. 부유할수록 유류비 인하 혜택이 커진다는 이야기다. 셋째, 환경. 기름값을 억지로 낮추는 정책은 탈탄소 및 탈화석연료 추세와도 배치된다.

거시적 흐름 앞 미시 대책은 한계
'인플레 파이터' 한은 적극 나설 때
재정 헛심 쓰는 소모전은 피해야

유류세 인하는 손쉬운 카드지만 유가가 오르면 소비자가 효과를 체감하기 어려워진다. 인하분을 정유사와 주유소가 중간에서 가로챈다는 의심이 일면서 이를 단속하느라 행정력을 동원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유류세 인하는 일종의 보편복지다. 포퓰리스트적 성격이 다분하다. 정치적 호응은 적겠지만 빈곤층과 영세 자영업자 등을 위한 유류세 환급제도 같은 선별적 복지가 더 효율적이다.

유류세 인하 폭 확대를 하루 앞둔 지난달 30일 경기 고양시의 한 주유소. 정부는 7월1일부터 유류세 인하 폭을 30%에서 37%로 높인다. 기존 유류세 30% 인하 때와 비교하면 휘발유는 L당 57원, 경유는 38원의 추가 인하 효과가 있다. [뉴스1]

유류세 인하 폭 확대를 하루 앞둔 지난달 30일 경기 고양시의 한 주유소. 정부는 7월1일부터 유류세 인하 폭을 30%에서 37%로 높인다. 기존 유류세 30% 인하 때와 비교하면 휘발유는 L당 57원, 경유는 38원의 추가 인하 효과가 있다. [뉴스1]

정부가 물가 관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장면들이 자못 레트로풍이다. 검사 출신인 금융감독원장이 시중은행에 고금리 장사를 경고하는 모습에는 관치금융의 잔상이 어린다. 지자체마다 휴가철을 앞두고 가동하는 물가단속반은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하다. 서민경제 안정 의지에는 손뼉을 치고 싶지만, 밀려오는 폭풍 앞에서 마당이나 쓸고 있는 듯해 안쓰럽기조차 하다.

지금의 인플레이션 상황에는 세계 경제의 보초병 격인 미 연준의 책임이 크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물가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지난해 초 "인플레이션은 일시적"이라는 안이한 태도를 보였다. 팬데믹으로 붕괴한 공급망, 5조 달러에 달한 트럼프·바이든 행정부의 경기부양 자금 등을 얕잡아본 실책이었다. 연준의 느슨한 경계를 틈타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사다리 삼아 우리 일상을 둘러싼 담을 넘어버렸다.

우리 정부와 한국은행도 비슷한 우를 저질렀다. 지난해 초 홍남기 당시 경제부총리는 물가 상승률이 통상적 관리 수준인 2%를 넘었음에도 '일시적'이라고 판단했다. 윤석열 정부는 전임 정부로부터 고물가·고환율·고금리를 물려받았다고 푸념했지만,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60조원 규모의 추경으로 돈을 풀었다. 한은도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미 연준이 5월 초 빅스텝을 밟고 6월에 추가 금리 인상까지 예고했음에도 5월 하순 우리 금통위는 베이비스텝(0.25%p 인상)에 그쳤다. 한·미 금리 역전 우려가 일며 원화 하락과 주가 하락이 뒤따랐다. 이달 13일 열리는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다. 예단할 수는 없지만, 공기는 매파 쪽이다. 물가 오름세가 예상보다 가파르다는 공감대에 한국은행 최초의 빅스텝(0.5%p 인상)이 기정사실로 되는 분위기다. '인플레 파이터' 한은의 본색과 실력을 보여줄 때다.

위기는 사실 시작되지도 않았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아니었어도 미·중 패권 전쟁으로 세계화는 이미 변곡점을 맞았다. 글로벌 공급망 중간 고리를 담당해 온 한국 경제에 닥친 거대한 도전이다. 투자 격언에 "미시는 거시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거대한 흐름이 바뀌는 판에 이를 늦추거나 되돌리려는 노력은 한계가 있다. 자칫 헛심만 쓰다 재정과 정책 카드만 낭비하는 소모전에 빠지고 만다. 긴축은 금융 팽창 과정에서 쌓였던 저효율과 저생산성을 정리할 기회가 될 수 있다. 큰 흐름은 주시하면서, 실탄은 아껴가면서, 스마트하게 움직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