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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16세기 급팽창한 유럽, 아시아 따로 떼내 구별짓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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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누가 유라시아를 둘로 나눴나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지구 표면의 모든 육지는 7개 대륙으로 구분된다. 면적 순서로 아시아,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남극, 유럽, 오세아니아다. 대륙과 대륙 사이는 바다로 갈라져 있는 것이 원칙이지만, 좁은 지협으로 이어진 남북 아메리카나 아프리카는 별개의 대륙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유럽과 아시아의 구분이다.

우랄산맥~흑해 이어지는 경계선
18세기 러시아 표트르 대제 설정

유럽중심주의가 낳은 역사적 산물
동경 90도 기준 동·서양 문화 달라

동양에선 문자·정치 강력한 통합
유일신 서양, 외부를 적으로 여겨

그리스·로마인은 어떻게 구분했나

러시아 중부 대도시 예카테린부르크에 있는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탑. 18세기에 설정한 경계가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 [사진 reddit.com]

러시아 중부 대도시 예카테린부르크에 있는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탑. 18세기에 설정한 경계가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 [사진 reddit.com]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의 유라시아대륙으로 본다면 세계 육지 면적의 36.5%로, 다음으로 큰 아프리카(20.3%)의 갑절 가까이 되고 인구가 53억여 명으로(2018 통계) 세계 인구의 70%를 차지하게 되니 두 개 대륙으로 가르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균형이 너무 심하다. 아시아의 면적은 유럽의 4.5배이고 인구는 6배다. 유럽을 떼어내고도 아시아 인구는 세계 인구의 60%를 점한다.

아시아-유럽 구분은 유럽중심주의의 역사적 산물이다. 16세기 이후 유럽인의 활동이 전 세계로 확장되면서 많은 곳에 자기식 이름을 붙였고, 19세기 이후 유럽의 학술이 (지리학 포함) 세계를 휩쓸면서 그 이름이 통용되게 된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처음으로 유럽과 구분해서 의식한 것은 그리스인이었다. 동쪽의 페르시아를 ‘아시아’로, 남쪽의 이집트를 ‘아프리카’로, 자기네 ‘유럽’과 구별했다. 아프리카와의 사이는 지중해로 갈라져 있고, 아시아도 처음에는 에게해-흑해 건너편으로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흑해 북쪽까지 활동이 넓혀지면서 육상 경계선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육상 경계선을 헤로도토스는 카프카스산맥 부근의 파시스강으로 생각했으나 로마인들은 돈강으로 생각했다. 동로마제국 시대에는 아시아와 유럽의 구별에 큰 의미가 없다가 그 멸망 후 이슬람권과 기독교권 사이의 차이가 분명해지기 시작했고,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제국을 일으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범주에 확실히 넣기 위해 아시아와의 구별을 강조했다. 우랄산맥-우랄강-카스피해-흑해로 이어지는 지금의 경계선은 표트르 대제의 후원 아래 러시아 지리학자들이 제창한 것이다.

새로 그려보는 동-서양 경계선

16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유럽 여왕(Europa Regina·1582)’ 그림. 다른 대륙에 대한 유럽의 우월성을 드러냈다. [사진 reddit.com]

16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유럽 여왕(Europa Regina·1582)’ 그림. 다른 대륙에 대한 유럽의 우월성을 드러냈다. [사진 reddit.com]

재러드 다이아몬드는농업문명의 전파가 남북보다 동서 방향으로 쉽게 이뤄졌다고 『총, 균, 쇠』에서 설명했다. 위도가 비슷한 지역으로 나아갈 때 발원지와 기후조건이 비슷한 곳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유라시아대륙은 동서로 펼쳐진 거리가 다른 대륙들보다 몇 배 길어서 농업문명 발전의 주 무대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유라시아대륙의 역사를 개관할 때 ‘동양’과 ‘서양’의 흐름을 나눠 살펴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워낙 길게 뻗쳐진 대륙이라서 그 양쪽 끝에서 독자적 발전의 여지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의 구분은 유럽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쥔 근대 상황에만 적합한 것이다.

서쪽에서 바라본 파미르산맥. 북위 25~45도 사이에서 유라시아 대륙은 세계에서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로 갈라져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서쪽에서 바라본 파미르산맥. 북위 25~45도 사이에서 유라시아 대륙은 세계에서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로 갈라져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대륙의 중간쯤 동경 90도 자오선 부근에 문명사의 경계선을 설정하면 어떨까. 그 언저리는 동토지대-사막-산악-아열대우림으로 이어진 넓은 폭의 인구 희박지역이었다. 이 경계선의 양쪽 사이에는 교통량이 매우 적었다. 실크로드가 각광받는 것은 교류가 적던 양쪽 사이에 이례적으로 조그만 통로나마 존재했다는 희소가치 때문이다. 어느 시기에도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는 각각의 지역 내 교류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는 군사적 충돌도 적었다. 한 무제 때 대완(大宛)을 정벌한 후로는 큰 충돌이 없다가 당나라가 탈라스 전투(751)에서 패퇴한 일이 있었을 뿐이다. 13세기 몽골제국의 흥기 과정에서 동서를 넘나드는 군사활동이 크게 일어났지만 4칸국의 분열 후로는 도로 사그라졌다. 한편 해로를 통한 동서 간 교역이 8세기경부터 서서히 늘어나다가 19세기에 유럽인의 증기선이 나타나 동서 간 장벽을 무너트리기에 이른다.

동양의 ‘천하제국’이 오래간 까닭

18세기까지 이 대장벽의 양쪽에서 각각 진행된 역사의 흐름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이 매우 적었다는 점에서 나는 이것을 동-서양의 경계선으로 본다. 서양, 즉 유라시아대륙 서반부에는 농경에 적합한 지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문명의 통합력이 약하고 중심지역이 옮겨 다니거나 병립하는 일이 많았다.

반면 동양에서는 황하-장강 유역의 농업화가 완성되어 ‘중원(中原)’으로 자리 잡자 그 규모가 주변 지역을 압도하게 되었다. 진 시황의 통일 이후 중원을 장악하는 세력이 ‘천하’의 주인을 자처하는 천하제국의 전통이 세워져 근세까지 이어진 것은 중원의 압도적인 생산력이 주변부의 도전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따금 주변부 세력이 중원을 정복하는 일이 있었던 것은 제국의 운영시스템 교체를 위한 일시적 현상 정도로 볼 수 있다.

강력한 중심부의 존재 여부가 동-서양 역사의 패턴에 차이를 가져왔다. 유럽인들은 로마제국의 위대한 통합성을 “팍스 로마나”로 치켜세우지만, 전성기 로마제국도 지중해세계를 통합해서 페르시아제국의 대륙세력과 맞섰을 뿐이다. 8~9세기 이슬람제국이 “서양의 천하제국”에 가장 접근한 사례였으나 그 또한 오래지 않아 분열로 돌아간 것은 생산력의 근거지가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통합력은 언어(문자)-종교-정치조직의 여러 층위에서 나타난다. 동양에서는 문자와 정치조직에서 강력한 통합이 이뤄지고 종교의 역할이 작았던 반면, 서양에서는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종교는 한편으로는 통합의 기제로 작용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대립의 기제가 되었다. 서양 주요 종교들이 모두 유일신을 받든다는 사실이 통합의 염원을 반영하면서 또한 그 현실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권에는 내부의 통합보다 외부와의 대립을 강조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기독교 내 다른 교파에 대한 박해가 다른 종교권에서 받는 박해보다도 더 심했다. 동화될 수 없는 ‘타자(他者)’에 둘러싸여 있다는 불안감이 널리 깔려 있었다. 외부를 모두 적으로 보고 그와의 투쟁을 통해 생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근대유럽의 ‘열린 세계관’은 이 불안감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컴퓨터기술과 한자의 새옹지마

16~17세기 유럽에서 ‘근대’를 향한 세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개혁, 주권국가 중심의 베스트팔렌체제 성립, 그리고 방언(vernacular)의 국어로의 발전이다. 종교개혁과 베스트팔렌체제는 기독교세계의 통합성을 상징하던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권위를 무너트렸다. 그리고 방언의 발전은 각국의 내부 결합력을 강화하면서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의 길을 열었다.

자판 2450개의 한자 타자기. 숙련 된 타자수라도 알파벳 타자기를 따라갈 수 없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자판 2450개의 한자 타자기. 숙련 된 타자수라도 알파벳 타자기를 따라갈 수 없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16세기 이후 유럽의 세계정복은 유럽의 경험을 세계 각지로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교 분립이라는 종교개혁의 성과와 베스트팔렌체제에 입각한 근대국가의 형태가 유럽의 영향력이 닿는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유럽의 학술과 사상이 ‘근대화’를 지향하는 모든 지식인의 표준이 되었고, 그에 따라 유럽 언어들의 역할도 자라났다.

이 근대화 풍조의 허실을 돌아보게 하는 재미있는 사례가 토머스 멀레이니의 『한자무죄(漢字無罪), 한자 타자기의 발달사』에 보인다. 중국의 근대화 선각자들에게 한자는 고약한 장애물로 보였다. 전보를 치더라도 글자 하나하나를 네 자리 숫자로 전환해서 보내고, 받는 쪽에서 이 숫자를 다시 전환해야 했다. 정보처리 능률이 알파벳문자보다 몇 배 떨어졌다. 그래서 “한자 폐지” 논의까지 나왔다.

그런데 새옹지마랄까. 컴퓨터기술이 발달한 21세기 상황에서는 한자의 정보처리 능률이 알파벳보다 우월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영어 ‘Chinese typewriter’ 입력에는 19타가 필요한데, ‘한자타자기(汉字打字机)’를 입력할 때는 각 글자 핀인의 첫 음소만 ‘hzdzj’로 치면 화면에 다섯 글자가 나타나고 엔터키로 확정하면 된다. 6타뿐이다.

정보처리에서 한자의 유-불리가 정보세계의 개방성과 폐쇄성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지금 입력방법에 나타나는 한자의 장점은 프로그램에 입력되어있는 한자 조합의 사례 안에서 유효한 것이다. 방대한 사례를 담을 수 있는 기술 발달 덕분에 한자가 유리하게 된 것이고, 이 사례를 벗어나는 새로운 조합을 시도할 때는 알파벳문자보다 능률이 못하다.

여기서 ‘열린 세계관’과 ‘닫힌 세계관’의 차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무한한 외부의 존재를 생각할 때는 과거의 경험보다 새로운 상상이 더 중요하고, 역사학의 의미는 과거의 설거지에 그친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세계로 생각한다면 과거의 재생(re-living)에서 지혜의 원천을 찾게 된다.

김기협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