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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정치적 중립과 민주적 통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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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사회디렉터

최현철 사회디렉터

시민의 기본권을 합법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권한과 힘이 공권력이다. 이 힘을 잘못 쓰면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쓰는 방식도 달라야 한다.

일반적인 행정부처는 정권을 얻은 쪽의 철학에 맞춰 효율적으로 행정력을 발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책임은 선거로 진다. 그러나 검찰과 경찰도 이렇게 운영돼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시대를 모르는 덜떨어진 사람 취급받기에 십상이다.

중립 없는 통제는 공권력 장악
윤 정부 행안부 경찰국도 비슷
비대한 경찰, 권한부터 분산해야

이소진 경찰청 직장협의회 위원장이 지난달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행안부 경찰국 신설 반대 1인시위를 하고 있다. [뉴시스]

이소진 경찰청 직장협의회 위원장이 지난달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행안부 경찰국 신설 반대 1인시위를 하고 있다. [뉴시스]

문재인 정부는 공권력을 보유한 검찰의 운영원칙으로 권한의 분산과 민주적 통제를 내세웠다. 권력이 집중되면 부패하기 마련이고, 통제 없이 놔두면 정권과의 유착을 넘어 스스로 권력집단화 한다는 주장이었다. 수사권 조정을 넘어 수사권 자체를 뺏은 것도, 법무부의 비검찰화를 추진한 것도, 장관의 지휘권을 아낌없이 쓴 것도 이런 논리에서다. 공권력의 정치적 중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겉보기엔 권한을 뺏기지 않으려는 검찰의 집단 반발에 밀린 것 같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하자가 있었다. 민주적 통제가 곧 선출된 권력의 통제라고 등치시킨 정권 핵심부 사고방식이다. 여기엔 똑같이 선거로 뽑혔지만, 자신들은 이명박·박근혜 정권과는 다르다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깔려있다.

또 다른 패착은 경찰에는 동일한 논리를 적용하지 않았다 점이다. 오히려 검찰 몫을 떼서 경찰에 얹어 살을 찌웠다. 자치 경찰이나 국가수사본부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인사나 행정권 같은 뿌리는 놔둔채 대문에 문패만 여러 개 붙인 것에 불과하다. 경찰은 원래 쉽게 장악되니, 굳이 쪼개서 힘 뺄 필요도 없다는 의미일까?

검찰이 이런 허약한 논리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다.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상대의 가장 아픈 곳을 집요하게 찔렀다. 조국 일가의 특혜와 일탈, 울산시장 부정선거 개입, 월성원전 경제성 조작 및 은폐 사건을 통해 정권 핵심부의 속내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결국 정치적 중립 없는 민주적 통제는 ‘공권력 장악’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점도 분명해졌다.

문재인 정부는 법무부 장관을 내세워 징계와 감찰·수사지휘권까지 남발하며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검찰 수장의 위상은 커져만 갔다. “총장은 장관의 부하가 아닙니다”는 어록도 이때 탄생했다. 핍박에 맞서다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이미지를 오롯이 품고 야당 후보로 나선 직전 검찰 총수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정권이 바뀐 뒤 검찰은 파죽지세로 잃어버린 권한을 회복하고 있다. 최근 단행된 검찰 인사는 전방위적인 전 정권 수사를 예고하고 있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의 형해화를 넘어, 자칫 정권과 한 몸이 돼 스스로 권력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벌써 차기 대선 주자 선호도 3위에 올랐다.

이제 전선은 경찰로 빠르게 이동 중이다. 행안부에 경찰국을 만들겠다는 이상민 행자부 장관의 선전포고로 경찰은 벌집이 됐다. “비대해진 경찰에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 장관의 논리다. 정치적 중립에 대한 고려와 언급은 전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중립 없는 통제에 반발해 싸운 끝에 권력을 통째로 접수했는데, 그의 핵심 측근이 전 정권과 똑같은 논리를 되풀이 하고 있는 셈이다.

정말 경찰이 뚱뚱(비대)해진 게 문제라면 살을 빼는 방안을 찾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자치 경찰에 실질적인 권한을 넘겨 치안을 맡기고, 중요한 범죄를 수사할 전문 수사조직을 만들고, 행정경찰은 간여하지 말아야 한다. 근본적 해결책을 회피한 채 ‘민주적 통제’라는 엄근진(엄숙·근엄·진지) 용어로 둘러대봐야 그냥 장악이다. 그 속내도 자신의 치부는 감추고 상대방 핍박하는데 편리하게 써먹기 위함일 것이다. 지난 정권과 우리는 다르다고? 이 역시 근자감일 뿐이다.

검찰이 그랬듯, 경찰도 반발하고 있다. 사상 처음으로 경찰청장이 정부 정책에 반발해 사표를 던졌다. 경찰 내부망에는 반박 글로 도배되고 있다. “경찰청장은 장관의 부하가 아닙니다”는 어록도 소환됐다. 하지만 그다지 힘이 실리는 것 같지 않다.

임기 초반이어서 새 정부의 힘이 세다는 점도, 사표를 던지면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적인 한계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 행안부가 아닌 청와대가 통제하면 되느냐”는 질문에 경찰 스스로 답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 더 큰 이유다. 비대해진 몸집은 그대로 둔 채, 대통령실만 바라보던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없다면, 어떤 경로로 통제하든 민주적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