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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주정완의 시선

제2금융권 사업자 대출, 경고등 켜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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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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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가뭄이 이어지다가 폭우가 쏟아진다. 날씨만이 아니다. 금융시장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초저금리는 가뭄, 최근의 금리인상 가속화는 폭우에 비유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감염병 대유행은 여러 번 있었지만 코로나19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다. 빚을 내기에 너무 좋은 여건을 만들어줬다. 보건의료가 아닌 금융의 관점에서 봤을 때 얘기다. 워낙 금리가 낮았기 때문에 대출 이자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상당수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은 원금을 갚을 걱정도 하지 않았다. 정부가 이들에 대한 대출 상환유예와 만기연장 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잠시만 그럴 줄 알았는데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면서 기간이 2년 넘게 길어졌다.

한은 “부실 우려 대출 잔액 89조”
저축은행 등 신용위험 커지는데
위기 대응할 금융위원장은 공석

이제 빚을 갚아야 할 때가 다가온다. 상환유예는 빚 갚을 시간을 벌어준 것일 뿐 영원히 갚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에 대한 대출 상환유예는 오는 9월 말로 마침표를 찍는다. 남은 시간은 3개월이다. 그런데 여전히 장사가 안된다고 울상인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이 적지 않다. 코로나19 충격으로 이미 가게 문을 닫고 폐업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는 사이 은행 등 금융회사가 자영업자에게 빌려준 돈은 엄청나게 불어났다. 한국은행이 최근 국회에 제출한 ‘2022년 상반기 금융안정보고서’를 보자.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자영업자 대출 잔액은 960조원에 달했다. 코로나19 이전(2019년 말)과 비교하면 276조원이나 늘었다. 이 중 부실이 우려되는 저신용·저소득 자영업자(취약차주)의 대출 잔액은 89조원으로 추산했다.

한은 보고서는 “자영업자 대출의 경우 복수의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은 다중채무자의 비율이 높다. 특정 대출이 부실화될 경우 업권간 부실 전염도 빠르게 늘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쉽게 풀어서 말하면 이런 얘기다. 여기저기서 되는 대로 돈을 끌어다 쓴 자영업자들이 적지 않다. 이런 사람이 돈을 못 갚으면 여러 금융회사로 한꺼번에 부실이 퍼질 수 있다.

폭우로 물난리가 생기면 가장 약한 고리부터 무너진다. 은행보다는 제2금융권이 상대적으로 약한 부분이다. 그중에서도 저축은행과 신용카드·캐피탈회사(여신전문금융회사)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한은은 지적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 저신용·저소득 자영업자들이 많이 찾아간 곳이다. 지난달 22일 금융감독원 보도자료는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저축은행 업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불법적인 사업자 주택담보대출 행태에 엄중 대응 예정’이란 긴 제목이었다. 미등록 사채업자도 아닌 저축은행에 대해 금감원이 공개적으로 불법이라고 지적한 건 매우 이례적이다. 대출 한도를 늘리기 위해 규제가 느슨한 사업자 대출로 위장하면서 서류 조작 같은 불법 행위가 적지 않았다고 금감원은 보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동산 시장의 분위기도 좋지 않다. 금융회사는 대개 부동산을 담보로 잡는다. 부동산 가격이 오를 때는 담보가치도 상승하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 만일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담보가치가 추락하면서 부실채권이 생길 수 있어서다. 벌써 일부 아파트 단지에선 기존 최고가보다 2억~3억원가량 떨어진 거래 사례도 나온다. 상가나 토지를 담보로 잡은 경우엔 아파트보다 거래가 더 어려울 수 있다. 과도한 빚을 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권의 시스템 리스크로 번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자영업자 대출에서 막대한 부실채권이 발생할 것으로 보고 대책을 마련 중이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 공적자금으로 부실채권 처리를 맡았던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이번에도 나선다. 국회 예산심사 자료에 따르면 캠코는 내년까지 18조원을 들여 부실채권 30조원어치(장부가 기준)를 사들일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금융회사는 대출금의 평균 40%를 손해 보는 것으로 계산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부실채권 처리를 진두지휘할 책임자가 보이지 않는다. 새 정부 금융위원장이 아직 임명되지 않아서다. 배는 거의 준비가 됐는데 선장이 없는 셈이다. 김주현 금융위원장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국회 원 구성이 늦어지면서 언제쯤 청문회가 열릴지 기약이 없다. 이미 사의를 밝힌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후임자가 오지 않아 어정쩡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렇게 시간만 흘려보낼 정도로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자영업자 대출은 매우 중요한 민생 문제다. 정치권은 여야를 떠나 경각심을 갖고 만반의 대책 마련에 협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