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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어쩌다 어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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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송길영 Mind Miner

송길영 Mind Miner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진짜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방송 출연은 어쩌다 해도 매체의 특성상 워낙 시청자 폭이 넓고 다양해 그동안 적조했던 지인들에게 연락이 와 생각지도 않았던 즐거움과 깨달음을 덤으로 얻게 된다.

오늘 아침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카톡 메시지로 “전화번호 바꿨니?”라는 질문부터 한다. 너무 오랜만이라 전화번호가 그대로일 거라는 확신이 없었나 보다. 초중고 시절 내내 붙어 다녔던 친구였건만 훌쩍 시간이 흘러 전화번호도 긴가민가할 만큼 연락이 뜸했던 모양이다. 통화 속 목소리는 어릴 적 그대로다. 반가웠고, 아련했다.

나이들어 범하기 쉬운 실수는
미래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일
나이듦은 필수, 성장은 선택
‘제대로 어른되기’ 결심 어떨까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오랜만의 친구와의 대화는 그와 부모님의 건강부터 시작한다. 그러고는 대화가 잠시 끊긴다. 궁금한 것은 많지만, 왠지 조심스럽다. 함께 하지 못한 그간의 세월 속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스쳐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그 무게가 결코 녹록지 않음을 나의 삶을 통해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괜한 이야기를 꺼내 내가 모를 그의 상처를 들추게 될까 조심조심 까치발을 들게 된다.

생업 전선에 일찍 뛰어든 탓에 학업을 계속하지 않았던 친구는 우리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다. 늘 상대를 배려하고 거친 표현도 삼가며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모임의 자리를 지켜주었다. 친구는 만약 자신이 공부를 계속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하는 이야기를 생전 처음으로 꺼냈다. 어쩌면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맞았을지 모르지만 그 기회를 얻기 위한 자격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조심스러운 한탄이었다.

친구가 처음으로 꺼낸 회한의 표현에 나 역시 처음으로 내 마음속 이야기를 그에게 전할 수 있었다. 내 기억 속 그는 늘 궁리하고 노력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뭔가에 빠지면 멈추지 않고 끝까지 파고들었다. 취미로 시작한 수영과 당구에서 기발한 셈법에 이르기까지 그 분야도 다양했다. 그 과정에서 경험하고 느낀 점을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친구에게 진심으로 전한 말은, 그 또한 어떤 분야건 지금이라도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최근 요리의 분야에서 장인의 경지에 오른 분들을 만날 감사한 기회를 여러 번 얻었다. 그중 한 분이 내어주신 요리는 감히 젓가락을 대기가 주저스러운 작품이었다. 직접 도자기를 굽고 그 위에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올리는, 예술과 요리의 경계를 허문 분인지라 그 정성과 시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가 전문가로 성장하고 인정받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어 오롯이 모든 것을 몸으로 겪어내고 터득해 유일무이한 자신만의 분야와 결을 만들어내는 분들도 계신다.

누군가는 규정으로 정해진 은퇴 나이가 가까워오며 자신의 일을 정리하는 분들도 있다. 반면 자신만의 숙고와 수련으로 채워져 영원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주는 분들도 있다. 이렇듯 개인의 삶은 조직이 정한 규칙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그러기에 언제나 시작해도 늦지 않음을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 힘주어 이야기해 주었다.

사람들은 어찌어찌 살다 불현듯 어른이 된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어깨에 짊어진 무게가 점점 더 늘어나며 나다움을 잊고, ‘내’가 아닌 ‘누군가’의 인생을 위해 살아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나온 궤적을 바라보며 과거를 후회하고, 현재를 체념하며 미래 마저 미리 당겨 탄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미래를 나의 가능성에서 제한하는 것이 나이듦의 단계에서 범하기 쉬운 가장 슬픈 실수가 아닌가 싶다.

“나이듦은 필수, 성장은 선택”

이번에 출연했던 TV 프로그램을 갈음한 마지막 문장이다. 어쩌다 어른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예전보다 더 오래 살 수밖에 없어진 요즘, 다시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기를 결심해 보면 어떨까 한다. 롤 모델을 세우고 대성공을 거두는 거창한 계획이 아닌, 살아온 날들을 보듬으며 이제부터 더욱 나다운 삶을 사는 ‘저마다의 내일’을 만들어 보기를 조심스레 희망해 본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눈을 감는다. 작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라디오의 기타 선율 속 밤새 꿈을 이야기하던 그때로 잠시 돌아가 본다. 성장을 갈망하는 한, 늦은 때는 없다는 것을 이해했기에 친구의 미래를 힘차게 응원한다.

송길영 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