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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 병원 알바 중 떠올렸다…'의사 없는 병원'의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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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엄마, 내일 전화할게요. 또 올게요!”
지난 20일 오후 3시경, 일본 도쿄(東京) 세타가야(世田谷)구 주택가의 3층 건물 이신칸(医心館). 신발을 꺼내 신던 중년의 여성이 휠체어의 백발 노모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말쑥한 유니폼 차림의 간병인이 휠체어를 밀고 돌아선다. 이어 흰색 가운을 입은 중년 남성 두명이 현관문으로 들어와 손 소독을 했다. 방문진료를 온 의사와 간호사다. 두 사람은 익숙한 듯 환자를 찾아갔다.

 일본 도쿄 세타가야에 있는 이신칸 일층에 있는 간호사 스테이션. 김현예 도쿄특파원

일본 도쿄 세타가야에 있는 이신칸 일층에 있는 간호사 스테이션. 김현예 도쿄특파원

이신칸은 '재택형 유료 노인홈'이다. 환자를 위해 의료의 마음을 담은 곳이라는 뜻이다. 요양병원·요양원·호스피스를 융합한 집 같은 시설이다. 상주 의사가 없으니 병원이랄 수도 없다. 24시간 365일 간호사·간병인이 있으니 의료 서비스가 가능하다. 집에서 쓰던 책상·불단(佛壇)·전자피아노 등을 가져다 놓으니 집 같다.

이신칸은 일본에서 손꼽히는 ‘재택의료’ 성공 모델이다. 동네의사가 왕진 와서 거주자를 진료한다. 응급 방문 진료도 한다. 거주자는 말기 암 환자가 70~80%이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는 75세 이상 초고령의 중증 환자도 있다. 방이 52개(크기 18㎡)이며 모두 1인실이다. 동네의사나 원래 치료받던 주치의 등 7~8명의 의사가 왕진 온다. 환자와 의사가 개별적으로 계약한다. 약사도 마찬가지다. 의사·약사 아웃소싱 형태다. 오시바 후쿠코(大柴 福子) 이신칸 운영본부장은 “이신칸은 의사가 상주하지 않는 병원이면서도 동시에 병원이라기 보다는 집 같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신칸에 있는 1인실. 창문을 열면 일반 주택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김현예 도쿄특파원

이신칸에 있는 1인실. 창문을 열면 일반 주택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김현예 도쿄특파원

3층 건물 층마다 ‘간호사 스테이션’이 있다. 간호사 24명, 개호복지사·홈헬퍼(요양보호사와 비슷) 24명이 입주자를 거의 1대 1로 돌본다. 방마다 높낮이 조절 전동침대, 욕창방지용 의료용 에어매트 등을 구비하고 있다. 방에는 침대와 작은 탁자만 구비돼 있다. 거주자가 집에서 쓰던 TV·책상·냉장고 등의 손 때 묻은 물건을 가져다 놓는다. 이곳 간호사는 “집에서 불단을 가져오거나 전자 피아노를 가져와 연주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화장실엔 푹신한 등받이와 양팔 손잡이, 앞으로 쓰러지는 걸 예방하는 지지대가 있다. 휠체어를 탄 채 목욕할 수 있다. 오시바 본부장은 “거동이 불편해도 용변과 목욕을 스스로 하려는 사람을 위해 꾸몄다”고 말했다.

거주자의 98.1%가 이신칸에서 임종한다. 그래서 호스피스 같기도 하다. 우스다 치에미(薄田千恵美) 간호사는 “이곳에서 임종하는 사람이 많아 슬프기도 하지만, 죽음이란 것 자체를 진지하게 바라봐야 할 때가 있다”고 전했다. 입주자와 가족처럼 지내고, 평소 죽음을 얘기한다. 그는 “돌아가시면 뭘 함께 묻어줄지 물어보기도 한다”고 말한다.

거주 비용은 월 14만9400엔(약 142만원). 도심이 아니면 이보다 낮다. 이신칸은 앰비스(Amvis)라는 회사가 운영한다. 2014년 처음 설립돼 도쿄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늘리고 있다. 지난 3월 기준 50곳이 있다. 홋카이도(北海道)를 포함해 올 하반기엔 58곳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앰비스는 2019년 10월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공용실인 이신칸 목욕실 풍경. 앉아서도 목욕을 할 수 있는 기기들이 구비돼 있다. 사진 김현예 도쿄특파원

공용실인 이신칸 목욕실 풍경. 앉아서도 목욕을 할 수 있는 기기들이 구비돼 있다. 사진 김현예 도쿄특파원

일반 병원에서 불가능한 ‘예외’가 있다. 창문을 열고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만질 수 있다. 의사가 허락하면 약간의 술을 마실 수 있다. 간호사가 안주용 과자를 제공한다. 화분 가꾸기, 서예 등의 취미 활동을 한다. 우스다는 “이신칸은 어떻게 마지막을 맞이할까 고민하는 곳이 아니라, 어떻게 마지막까지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담배만 안 될뿐 일상생활에서 누리던 것을 임종 직전까지 최대한 누리게 한다.

앰비스 최고경영자(CEO) 시바하라 케이이치(柴原慶一·58)는 나고야대 의학부를 졸업한 의사다. 1년간 의사 생활을 하다 교토대(京都大)에서 의학분야 기초과학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의 은사가 201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혼조 타스쿠(本庶佑) 교수다. 노벨상 수상 논문엔 시바하라 이름이 실려있다.

의사 반발은 없다고 한다. 왕진 횟수만큼 수입이 늘어나는 구조다. 의료자원이 부족한 시골일수록 지역 의사의 협조가 잘 된다. 시바하라 대표는 “정부도 재택의료를 지원하고 있다”며 “저출산·고령화를 맞이한 한국도 의료 부족 등을 푸는 해결책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일본과 한국은 비영리법인만이 요양시설을 운영할 수 있다(한국은 개인이 가능). 그런데 '이신칸 기업'이 가능한 이유는 이신칸이 노인홈, 즉 노인복지주택(일명 실버주택)이라서다. 우리도 기업이나 개인이 실버주택을 할 수 있고, 30여곳이 있다. 일본은 말기환자를 위한 보급형 시설이지만 한국은 비교적 건강한 노인이 여생을 보내는 비싼 곳이다. 일본은 1957년 '요양담당 규칙'을 제정해 누구나 왕진을 할 수 있다. 의료보험 수가가 높고 가산된다. 재진할 때 전화로도 가능하다. 한국은 시범사업 참여자로 인정받은 332개 동네의원만 왕진할 수 있다. 이신칸의 간병비·간호비는 개호보험(한국의 장기요양보험)이나 의료보험이 된다.

'아르바이트'하다 떠오른 아이디어

지금 형태의 이신칸이 생겨난 건 우연한 기회였다. 앰비스 최고경영자(CEO) 시바하라 케이이치(柴原慶一·58)의 얘기다. 나고야대 의학부를 졸업한 그는 1년간 의사 생활을 하다 교토대(京都大)에서 의학분야 기초과학 연구에 뛰어들었다.

이신칸을 운영하고 있는 시바하라 케이이치 앰비스 홀딩스 대표가 지난 20일 도쿄 본사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김현예 도쿄특파원.

이신칸을 운영하고 있는 시바하라 케이이치 앰비스 홀딩스 대표가 지난 20일 도쿄 본사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김현예 도쿄특파원.

사업을 해보곤 싶었지만 의료현장을 잘 몰랐다. 시골 한 병원에서 외래 당직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1박2일, 2박3일씩 병원에 대기하며 일하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호출이 없었다. 암 말기 환자나, 만성 환자들이 많은 노인병원이었던 탓이었다. “자면서 당직한다”고 할 정도로 할 일이 없었다. 환자들은 이미 병명을 진단받은 상황이었고, 치료를 포기할 정도로 임종에 가까운 환자들이 많으니, 당직을 서도 간호사 호출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배우러 갔는데, 아무도 불러주지 않으니 너무 심심했다”고 할 정도였다.

‘상주하는 의사, 꼭 있어야 할까?’

일본 도쿄 세타가야에 있는 이신칸. 서예가 취미인 입주자가 쓴 글씨가 간호사 스테이션에 붙어있다. 사진 김현예 도쿄특파원

일본 도쿄 세타가야에 있는 이신칸. 서예가 취미인 입주자가 쓴 글씨가 간호사 스테이션에 붙어있다. 사진 김현예 도쿄특파원

하루는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간호사들의 동선을 지켜보기로 했다. 병원인데, 상주 의사가 꼭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의사가 필요할 땐 간호사들이 전화를 걸어 호출을 하는 걸로 충분했다. 무릎을 쳤다. “병원에 의사가 365일 상주해야 한다는 상식을 버려야 겠다”싶었다. 의사가 365일 상주하지 않아도 운영할 수 있는 병원, 간호사가 중심이 돼 운영하는 병원이라는 아이디어는 그렇게 생겨났다.

고민을 거듭할 수록 ‘의사 아웃소싱을 할 수 있다면 고령화시대에 의료과소지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2010년 연구자의 길을 접고 인구 대비 의사 수가 부족한 의료과소지를 찾아나섰다. 그가 찾은 곳은 이와테(岩手)현. 인구는 많지만 국공립 의대가 없는 곳 중 하나였다. 폐쇄 예정이던 현립병원의 병상을 마을 주민들과 ‘노인홈’으로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그로부터 3년 뒤 미에(三重)현의 파산한 한 민간병원을 재건해보자는 제안을 받으면서 기업가로서의 길이 트이기 시작했다. 일종의 ‘사회 실험’에 도전했다. 병동 의사는 ‘방문 의사’로, 간호사 역시 ‘방문 간호사’로 바꿨다.병상은 양로원과 같은 노인홈으로, 병동주치의는 왕진 주치의로만 바꿨을 뿐인데도 병원재정은 달라졌다. 병실이 늘 만실이었어도 만성 적자였던 병원이 흑자로 돌아선 것이었다.

시바하라 대표는 “환자 입장에서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놀라운 점이었다”고 했다. 보험제도 때문이었다. 일본 의료보험은 보험 대상자를 ‘후생노동성 장관이 정하는 자’로 특정하는데, 말기 악성 종양 환자나 인공호흡기 등을 사용해야 하는 중증 환자를 대상으로 방문 의료시, 의료보험·개호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그러다보니 환자 입장에선 환자 부담금(의료비 총액의 0~30%)이 전혀 달라지지 않으니 방문 진료가 불편할 턱이 없었다. 병원 입장에선 의사 아웃소싱의 효과는 상당했다. 상주 의사를 두지 않아도 되니 각종 검사기계 구입비, 당직 비용이 들지 않았다.

이신칸 내부 모습. 1인 1실 구조로 이사오듯 평소 쓰던 물건을 이곳에 가져와 쓸 수 있다. 방에는 세면대와 개인 화장실이 딸려있다. 병원에서 쓰는 환자용 침대와 작은 탁자가 구비돼 있다. 사진 앰비스

이신칸 내부 모습. 1인 1실 구조로 이사오듯 평소 쓰던 물건을 이곳에 가져와 쓸 수 있다. 방에는 세면대와 개인 화장실이 딸려있다. 병원에서 쓰는 환자용 침대와 작은 탁자가 구비돼 있다. 사진 앰비스

시바하라 대표는 그해 회사를 세우고, 이신칸을 만들기 시작했다. 타깃은 ‘월세’에 해당하는 임대료를 지불할 수 있는 중산층 고객을 대상으로 했다. 병원에 더는 머물기 어려운 말기 암 환자 등을 돌보기 시작하면서 이신칸의 숫자는 점차 늘었다. 앰비스는 그덕에 지난 2019년 10월 상장사가 됐다.

그는 “10년 전만 해도 재택의료를 하는 의사가 적었지만, 정부 정책이 병원의료 중심에서 재택의료 중심으로 바뀌면서 재택의료 형태의 이신칸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시바하라 대표는 “오는 2025~2026년까지 이신칸을 전국 100곳에 세울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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