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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갚아주되 청구서 날리나…강제징용 대위변제, 마지막 단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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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강제징용 피해자를 위한 배상이 '대위 변제' 방식으로 이뤄진다면 완성을 위한 마지막 단추는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구상권 행사다. '현금화'라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대위 변제라는 절충안을 택하더라도 전범 기업에 법적 책임을 묻는 절차는 필수이기 때문이다.

2018년 10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뒤 손을 흔드는 모습. 김상선 기자.

2018년 10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뒤 손을 흔드는 모습. 김상선 기자.

대신 갚아주되 '청구서' 날린다

'대위변제'는 채무자 대신 제3자가 변제에 나선 뒤 채권자로부터 권리를 넘겨 받아 추후에 구상권으로 이를 행사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 '빚을 대신 갚아주고 나중에 돈을 받는다'는 개념이다.

한‧일 ‘현금화 시한폭탄’ 어떻게 멈추나-下

강제징용에 이를 적용할 경우 한·일 기업이 성금이나 기금을 모아 재단 등 제3의 주체를 만들어 여기서 2018년 대법원 판결에 따라 손해 배상 권리를 인정받은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재단 등이 추후에 피고인 일본 전범 기업들에 구상권을 청구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 전범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강제 매각하는 '현금화' 조치가 임박한 데 따라 제기되는 방안이기도 하다.

여기서 핵심이자 가장 큰 난제는 마지막 단계인 구상권 청구다. 전범 기업에 대한 구상권 청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전범 기업의 배상 책임에 면죄부를 준 것과 뭐가 다르냐'는 역풍에 직면할 수 있다. 대법원 판결은 기본적으로 전범 기업들이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피해자들에게 저지른 반인도적 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2018년 11월 강제징용 피해자 故 박창환씨의 아들 박재훈씨가 2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리는 강제징용 및 근로정신대 피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상대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뒤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소감을 밝히는 모습. 뉴스1.

2018년 11월 강제징용 피해자 故 박창환씨의 아들 박재훈씨가 2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리는 강제징용 및 근로정신대 피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상대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뒤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소감을 밝히는 모습. 뉴스1.

대법원 판결 따르려면…

따라서 일본 기업의 책임을 묻는 법률적 절차 없이는 2018년 대법원 판결에 따른 사법 정의 실현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일본이 구상권 청구에 응할지 여부와 관계 없이 한국은 자국 국내법에 근거한 구상권 청구 과정을 반드시 밟아야 한다"며 "구상권 청구 없는 대위 변제는 2018년 대법원 판결에 위배될 뿐 아니라 법적 완결성도 담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구상권을 청구한다는 담보 없이는 피해자를 설득할 명분도 약해진다. 자칫 정부가 피해자를 위한 사법정의 실현 측면은 도외시한 채 한ㆍ일 관계 개선을 위한 미봉책으로 대위 변제 카드를 꺼냈다는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 피해자를 배제한 채 정부 주도로 추진했다 역풍을 맞은 2015년 위안부 합의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구상권 벌써 선 긋는 日

하지만 일본은 한국의 구상권 청구에 응하는 것 자체를 강제징용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는 행위로 생각해 거부할 가능성이 크다.

외교 소식통은 "일본 자민당 내에선 일본이 법적 책임을 지는 듯한 모양새가 되는 그 어떤 해결책도 용납할 수 없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1965년 한ㆍ일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징용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며 대법원 판결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이 해당 판결 이행을 전제로 한 구상권 청구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전직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한ㆍ일 기업 출연금으로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는 문제까지는 일본과 협의가 가능하겠지만, 이후 한국 측이 일본 기업에 다시 구상권을 청구한다면 일본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한ㆍ일 간 새로운 외교적 문제를 낳을 게 뻔해 강제징용 문제는 '영구 미제'로 남게 된다"고 말했다.

정부가 임박한 현금화 조치에 제동을 거는 데만 집중한 나머지 대위변제 후 구상권 행사 절차에 대한 정교한 고민을 하지 않으면, 피해자의 반발을 살 뿐 아니라, 한ㆍ일 관계에도 역풍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10일 오후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일본 외상과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10일 오후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일본 외상과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회색 지대'서 해결책 찾아야

결국 해결책은 대위변제 자금 조성에 전범 기업의 참여를 최대한 이끌어내고, 현실적 해법에 대한 피해자의 이해를 구하는 데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만일 대법 판결의 피고인 일본 기업이 자발적으로 낸 기금으로 대위 변제가 이뤄질 경우, 결과적으로는 일본 전범 기업이 낸 돈이 피해자에게 돌아가게 된다. 대법원 판결문을 문자 그대로 이행하는 '법적 배상'은 아니어도 '실질적 배상'의 성격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긴다.

물론 피해자들이 대법원 판결의 '기술적 이행' 대신 이런 '취지의 이행'이라는 현실적인 해법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대위 변제를 통한 실질적 배상과는 별개로 '법률적'으로는 구상권을 보유하고, 행사 의지를 확실히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반대로 같은 돈을 두고도 일본 측에서는 불법 행위 인정을 전제로 한 대법 판결의 이행이 아닌 자발적 기금 출연으로 주장할 수 있다. 구상권 청구에 응하는 것과는 역시 별개의 문제다.

이럴 경우 한ㆍ일 모두 각자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회색 지대'를 조성해 외교적 해법을 찾는 게 가능할 수 있다. 외교에서 '100대 0'의 전승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한 명이라도 더 생존해 있을 때 한ㆍ일 간 접점을 찾아 한을 풀어준다는 대의 자체는 살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대위 변제를 골자로 2019년 급부상했던 '문희상 안'에 대해서는 피해자 단체가 "일본 기업의 자발성을 전제로 한 기부금은 법적, 역사적 책임을 지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반발했다. '돈의 성격' 규정과 구상권 행사에 대해 명확히 정리하지 못할 경우 또 다른 갈등의 전선으로 확대돼 제2, 제3의 대위 변제 안도 결국 실현되긴 쉽지 않을 거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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