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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진 의사, 돌연 냉장고 열고 혼내는데…"살것 같다"는 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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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송대훈 파주연세송내과 원장이 지난달 31일 경기 파주 탄현면에 위치한 박규석(87)씨의 집에서 방문진료를 하고 있다. [이우림 기자]

송대훈 파주연세송내과 원장이 지난달 31일 경기 파주 탄현면에 위치한 박규석(87)씨의 집에서 방문진료를 하고 있다. [이우림 기자]

지난달 30~31일 경기도 파주시 왕진 의사 송대훈 파주연세송내과 원장과 동행했다. 31일 오후 당뇨병·고혈압을 앓는 박규석(87)씨 집으로 향했다. 환자는 침대에 앉아있다. 지팡이 짚고 마당에 나가는 정도만 움직인다. 왕진 2년 차 환자이다. 송 원장은 박 씨의 심장이 안 좋은 것 같아 검사하라고 요청한 상태다. 우선 간호사가 혈압과 혈당을 검사했다. 송 원장이 보호자인 둘째 사위 윤종범(65)씨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입맛이 없지 않나요" "울렁거리거나 토할 것 같은 증세가 있나요" "입이 마르거나 다른 불편한 점은 없나요" 등등.

왕진의사 손길 기다리는 환자들 #거동 불편한 만성질환자 급증 #의사가 위생상태, 식습관도 확인 #단순 진료보다 치료에 큰 도움 #"왕진 절실한 이들에 혜택 늘려야"

갑자기 송 원장이 냉장고로 향하더니 문을 열며 몰아붙인다. "우리 아버지(환자 박 씨를 지칭), 짜게 드시는 것 같은데, 냉장고 뒤져보면 다 아는데요. 지난번에 보니까 장아찌 이런 것만 있던데요." 사위 윤씨가 당황한 듯 "아녀요…"라고 얼버무린다.

송 원장이 박 씨의 팔·다리·종아리 등을 만지며 잔소리를 덧붙인다. "두부·달걀 같은 것 잘 챙겨 드시면 좋은데. 그런 거 잘 드셔야 해요. (안 그러면) 자꾸 기운 빠져요. 평생 농사짓던 분인데 이게(근육) 다 빠졌잖아요. 지금 운동을 하셔야 해요."

송 원장은 "약을 하나 추가했다. 심장 검사 결과를 보고 얘기하자"며 "짜게 먹으면 절대 안 된다"고 재차 당부한다. 사위 윤 씨는 "(원장님이) 혹시 냉장고에 술이라도 있을까 종종 열어보곤 한다. 식구처럼 대해주는 게 정말 좋다"고 말했다.

 송대훈 파주연세송내과 원장이 지난달 31일 경기 파주 탄현면에 위치한 장순택(74)씨의 집에서 방문진료를 하고 있다. [이우림 기자] ※복지팀 외 사용금지

송대훈 파주연세송내과 원장이 지난달 31일 경기 파주 탄현면에 위치한 장순택(74)씨의 집에서 방문진료를 하고 있다. [이우림 기자] ※복지팀 외 사용금지

이날 세 번째 환자를 만났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장순택(74·경기 파주)씨는 하루의 대부분을 좁은 침대 위에서 보낸다. 온종일 앉아 있다 보니 발목이 퉁퉁 부었다. 최근에는 당뇨병성 족부질환(당뇨발, DM Foot ulcer)으로 왼쪽 발목에 궤양이 생겼다. 빌라 2층에 사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꿈도 꾸지 못한다. 병원에 갈 때마다 전쟁이다.

1년 전 송 원장의 왕진이 고민을 덜어줬다. 환자 부인 박건배(68) 씨는 “우연히 지나가던 왕진 차량을 보고 연락했다”며 “의사 선생님이 집으로 와 하나하나 살피니 힘이 덜 든다”고 말했다. 박 씨는 진료실이 아닌 집에서 의사를 만나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진료실에선 왠지 위축돼 질문도 못 했는데, 그런 심리적 거리감이 줄었다고 한다.

"배가 더 나온 거 같네요."(송 원장)
"자꾸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변비가 아닌가 싶어요."(환자 부인)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정기적으로 변을 봐야 배에 가스가 안 찹니다."(송 원장)

송 원장의 시선이 환자의 발목을 향했다. 송 원장은 "상처는 깨끗하다. 어머니(박 씨를 지칭)가 자주 갈아줬나 보다"면서 "살이 차오르지 않는 게 문제인데 어쩌면 피부 이식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환자는 소독할 때 신음을 냈다. 진료를 마친 송 원장은 "이사 준비는 잘 돼 가냐"며 소소한 일상을 묻기도 했다.

재택진찰에만 보통 20분 걸린다. 송 원장은 “환자 집에 가면 뭘 먹는지, 영양제는 챙겨 먹는지, 운동은 하는지 등의 생활습관을 확인할 단서들이 많다. 그런 걸 들여다보자니 진료실보다 시간이 더 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경심 서울36의원 원장(오른쪽)과 이정선 간호실장(왼쪽)이 8일 오후 서울 혜화동의 한 가정을 방문해 상담 후 진료를 보고 있다. 강정현 기자

고경심 서울36의원 원장(오른쪽)과 이정선 간호실장(왼쪽)이 8일 오후 서울 혜화동의 한 가정을 방문해 상담 후 진료를 보고 있다. 강정현 기자

박지영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민들레의원 원장은 "방문 진료를 나가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환자를 찾아가는 사람들』스토리플래너). 박 원장은 "가족 표정은 어떤지, 누가 오가는지, 벽에 무엇이 걸렸는지, 바닥이 깨끗한지, 문턱이 얼마나 높고 욕실 바닥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약은 제대로 보관하는지, 무엇을 먹는지 등을 본다"며 "환자를 통합적 인간으로 보게 되고, 환자의 삶이 눈에 들어오면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말한다. 소위 포괄적·통합적 치료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왕진 의사는 때로는 사회복지사가 된다. 박 원장은 당뇨가 조절되지 않는 노인이 넘어져 꼼짝 못 한다는 얘기를 듣고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경제난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 했고, 식사를 못 하니 저혈당이 걱정돼 약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박 원장이 "왜 그런 얘기를 안 했느냐"고 물었더니 "바쁘신데, 어떻게 하냐"며 얼버무렸다. 박 원장은 도시락 서비스를 연결하고 20가지 넘는 약을 정리해줬다.

유상미 인천평화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사회복지사는 방문 의료 코디네이터다. 유 복지사는 "뇌경색·뇌출혈로 인해 장애가 있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방문 의료의 주 대상이지만 집에서 나오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도 방문 의료가 필요하다.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피부질환이 있고, 정신질환도 있다"고 말했다. 27년 발달장애인 아들을 돌봐온 어머니 정 모 씨는 "아들이 병원을 극도로 무서워하는 탓에 여태까지 소변검사·혈액검사 같은 기본 검사조차 해본 적이 없다"며 "원시시대에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씨는 "꼭 어딘가 아픈 때가 아니더라도 집으로 의료인이 찾아와 서로 얼굴도 익히고 건강 관리도 해준다면 좋을 것 같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왕진의 손길이 절실한 재택환자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박 원장은 "방문 진료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주변에 의사를 필요로 하는 아픈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됐다"고 말한다. 소변줄 하나를 바꾸기 위해 엘리베이터 없는 계단을 가족이 매달려 내려야 하는 척수장애인, 몸을 일으키기조차 힘든 근육병 환자, 병원에 가기 싫다고 보호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심한 발달장애인…. 그러나 지난해 138개 동네 의원이 재택환자 4195명을 왕진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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