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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후손없는 광복군 17분 유해, 77년만에 현충원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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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정부가 광복군 활동 중 순국했으나 후손이 없어 합장한 애국지사 17분의 유해를 광복 77년 만에 국립묘지로 이장을 준비 중인 것으로 27일 나타났다.

열 분 이상 단체 이장은 건국 이래 처음

서울 강북구 수유리의 애국선열 및 광복군 합동묘역에 있는 '한국광복군 무후선열 17위 합동묘'의 모습. [사진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서울 강북구 수유리의 애국선열 및 광복군 합동묘역에 있는 '한국광복군 무후선열 17위 합동묘'의 모습. [사진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10분 이상의 애국지사 유해가 한꺼번에 국립묘지에 이장되는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독립운동과 관련한 첫 정부 행사(기념일 제외)로 열릴 것으로 보이는 만큼, 윤 대통령이 직접 이장 행사에 참석할지 주목된다.

이날 복수의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국가보훈처는 현재 서울 강북구 수유리 애국선열 및 광복군 합동묘역에 있는 ‘한국광복군 무후선열 17위(位) 합동묘’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기기 위해 관련 단체와 협의 중이다. 한 소식통은 “상징성을 고려해 오는 8ㆍ15 광복절 즈음에 이장하는 방안이 유력하다”며 “다만 장마 등으로 현 합동묘에 대한 실태조사가 늦어질 경우 광복군 창건기념일인 9월 17일로 미뤄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합동묘 이장과 관련해 “현재 서울현충원은 자리가 없어 장지는 대전현충원이 유력하다”고 말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현재의 합동묘는 지난 1967년 광복군동지회가 이시영 선생 등 애국선열이 먼저 묻힌 수유리에 조성했다. 광복군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과 아들 지달수 지사(광복군 2지대 간부) 등이 1946년 입국하면서 국내 봉환한 유해였다.

이들은 대부분 결혼도 하지 않은 꽃다운 나이에 순국해 후손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합동묘가 조성되기 전까지 안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서울 조계사에 모셨다고 한다.

합동묘 조성 당시 국내에서 연고도 없이 숨진 지사 세 분을 함께 모셔 당초엔 19위였다. 이후 김천성 지사(1968년 추서), 한성수 지사(1977년 추서)가 독립장을 받으며 각각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해 현재의 17위가 됐다.

광복군동지회가 1967년 4월 28일 '광복군 선열 묘비' 제막식을 기념해 서울 강북구 수유리 합동묘에서 찍은 사진. [사진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광복군동지회가 1967년 4월 28일 '광복군 선열 묘비' 제막식을 기념해 서울 강북구 수유리 합동묘에서 찍은 사진. [사진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국립묘지 이장 논의는 광복군동지회의 후신인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가 지난달 26일 정부에 건의하면서 시작됐다. 보훈처가 지난해 2월 수유리 일대 묘역을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했으나, 국립묘지는 아니어서 예우 문제가 줄곧 지적됐다.

이형진 광복군기념사업회장은 “그동안 역대 정부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 온 선열들의 유해를 새 정부에서만큼은 꼭 이장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요청했다”며 “다행히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명해 이장과 관련한 세부 사항을 현재 긴밀히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장 준비 과정에서 난관도 드러났다. 합동묘에 모신 선열 중 한휘 지사(1944년 7월 순국)가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지사는 1942년 5월 광복군 2지대에 입대해 본부 요원으로 활동했다.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광복군을 모으며 정찰 활동을 벌이던 도중 체포돼 순국했다.

광복군동지회가 1967년 수유리 합동묘 조성에 앞서 묘비에 새길 비문을 사전에 정리한 자료. “비바람도 찾어라 / 나라잃은 나그네야 / 바친길 비록 광복군이였으나 / 가시밭길 더욱 한이었다 // 순국하고도 못잊었을 / 조국이여 꽃동산에 / 뼈나마 여기 묻히었으니 / 동지들아 편히 잠드시라”는 비문과 함께 최초 안장 예정이던 순국선열 16분의 이름이 적혀 있다. [사진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1967년 광복군동지회가 수유리 합동묘를 조성하기에 앞서 제작한 유골 안치소 설계도. [사진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하지만 이같은 공적이 그간 평가받지 못했다. 정부 소식통은 “뒤늦게 국립묘지 이장을 앞두고 서훈 심사를 시작했다”며 “최근 보훈처 공적심사위원회가 공적을 인정해 통과됐다”고 말했다. 한 지사에겐 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될 것으로 보인다.

이 소식통은 “서훈 문제가 매듭을 지어 17분 모두 함께 이장할 수 있게 됐다”며 “합동묘 실태조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이장 절차가 구체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보훈처는 중앙일보의 관련 질의에 “광복군 유해를 국민적 추모 공간인 국립묘지로 이장해 한 분 한 분을 제대로 예우하는 게 의미가 있다”며 “현 합동묘의 안장 실태를 파악하고 관련 단체 등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국립묘지 이장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 한국광복군 무후선열 17위 명단 (가나다 순) 


-김성률(1920년 4월~1943년 9월): 광복군 2지대 대원, 적후방 공작 중 전사.
-김순근(1925년 3월 1일~1945년): 광복군 3지대 대원, 베이징 지역에서 초모공작.
-김운백(1921년 8월~1943년 9월): 광복군 2지대 대원, 중국 산시성에서 ‘태항산 전투’ 중 전사.
-김유신(1916년~1943년): 광복군 2지대 대원, ‘태항산 전투’ 중 전사.
-김찬원(1917년 1월~1945년 8월17일): 광복군 2지대 대원, 지하공작 중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
-동방석(1921년 4월~1971년 1월 21일): 광복군 2지대 대원, 광복 후 국내에서 별세.
-문학준(1910년 7월~1943년 8월): 광복군 2지대 대원, 중국군에 파견돼 작전 중 전사.
-백정현(1920년 12월 17일~1944년 4월): 광복군 2지대 대원, 일본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가 탈옥 기도로 총살 순국.
-안일용(1921년 10월~1943년 5월): 광복군 2지대 대원, 공작활동 준 순국.
-이도순(1907년 7월~미상): 광복군 2지대 대원, 광복 후 국내에서 별세.
-이한기(미상~1943년 7월): 광복군 3지대 대원, OSS 훈련대원 활동.
-이해순(1919년 3월 11일~1945년 8월 17일): 광복군 2지대 대원, 공작활동 주 체포돼 감옥에서 순절.
-전일묵(1920년 6월~1945년 8월 17일): 광복군 2지대 대원, 초모공작 중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
-정상섭(1921년 2월~1943년 9월): 광복군 2지대 대원, ‘태항산 전투’ 중 전사.
-조대균(미상~미상): 광복군 2지대 대원, 광복 후 국내에서 별세.
-한휘(미상~1944년 7월): 광복군 2지대 대원, 초모공작 중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
-현이평(미상~1941년): 광복군 5지대 대원, 민족의식 고취하는 선무공작 중 피살.

광복군 2지대 대원들이 '한국광복군(Korea Independent Army·KIA)'을 뜻하는 영문 이니셜을 집체 모양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광복군 2지대 대원들이 '한국광복군(Korea Independent Army·KIA)'을 뜻하는 영문 이니셜을 집체 모양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 한국광복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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