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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이민자에서 와이너리 오너까지"...나파밸리 유일한 한인 여성 와인메이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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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76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와인 시음회가 열렸다. 내로라하는 와인 평론가들이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을 맛봤다. 공정을 위해 눈은 가렸다. 혀끝으로만 평가하기 위해서다. 결과는 놀라웠다. 당시 풋내기 와인 생산국인 미국 와인이 와인 종주국인 프랑스 와인을 제치고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부문에서 각각 1위를 휩쓸었다. 와인 업계에서 ‘파리의 심판’으로 불리는 유명한 사건이다.

미국 나파밸리 와인포니아 ‘세실 박’ 대표

도도했던 프랑스 와인의 콧대를 꺾은 미국 와인이 바로 캘리포니아 나파밸리(Napa Valley) 와인이다. 미국의 자랑이자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인 이곳은 유명세만큼이나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다. 전체 와이너리(포도밭과 양조시설을 갖춘 곳) 10곳 중 9곳은 가족경영으로 운영하는 이곳에서 와인을 만드는 한인 여성이 있다. 세실 박(48) 와인포니아 대표다.

미국 나파밸리에서 유일한 한인 여성 와인메이커인 세실 박이 23일 오후 서울 한남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미국 나파밸리에서 유일한 한인 여성 와인메이커인 세실 박이 23일 오후 서울 한남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나파밸리에서 와인을 만드는 한인 여성은 박 대표가 유일하다. 그는 농부이자 와인메이커다. 포도 재배부터 와인 제조, 와이너리 디자인까지 전 과정을 직접 관리한다. 와인 브랜드 ‘이노바투스’ 뿐 아니라 컬트 와인(소량 생산하는 고품질 와인)도 만든다. 2008~2010년 하와이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투어(LPGA), 미국남자프로골프투어(PGA) 기념 와인(각 500병)도 박 대표의 작품이다.

평범한 대학생서 와인메이커로…“와인 맛 반해”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박 대표는 경영학 공부를 위해 찾은 미국에서 26세에 처음 와인을 맛봤다. 지난 23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만난 박 대표는 “전공이 식품생명공학인데 당시 와인이 정말 맛있었고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와인 연구소에 인턴으로 입사해서 와인 공부를 시작했고 와인으로 유명한 UC 데이비스 대학에서 포도밭 농사까지 배웠다. 박 대표는 “모든 음식의 재료가 중요하듯 포도밭을 운영, 관리하면서 재료(포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와인을 만들 때도 고유의 맛이나 조화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나파밸리를 ‘천상의 땅’이라고 부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동쪽으로 60㎞ 떨어진 나파밸리는 포도가 자라기 좋은 기후 조건과 토양을 갖췄다. 여름에는 덥고 건조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비가 내린다. 특히 500여 개 빈야드(Vineyard, 포도밭)가 펼쳐진 고도 92~370m 지점은 낮에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고 밤에 서늘하다.

헬레나 산맥 분화 영향으로 이곳의 빈야드는 화산재(자갈)가 많은 황토색이다. 배수가 잘되는 이 땅은 물이 많으면 치명적인 포도 재배에 적합하다. 박 대표는 “겨울에 내린 비가 땅을 깨끗하게 청소해주면 여름에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포도가 달게 익어간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좋은 와인을 만들기 어려운 이유도 기후다. 박 대표는 “겨울이 너무 추우면 포도나무가 버텨내질 못하는데 한국 겨울은 너무 춥다”며 “하지만 한국의 전통 농법을 와인 제조에 활용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와인은 발효식품…건강에 좋아” 

박 대표가 만드는 와인은 ‘건강한 와인’이다. 미국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나파밸리에 여성 이민자인 박 대표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박 대표는 “와인은 발효식품이라 제대로 만들면 프로바이오틱스부터 항산화 물질까지 몸에 좋은 성분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미국 나파밸리에서 유일한 한인 여성 와인메이커인 세실 박이 23일 오후 서울 한남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미국 나파밸리에서 유일한 한인 여성 와인메이커인 세실 박이 23일 오후 서울 한남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박 대표는 이노바투스 피노누아는 ‘아침에 마시기 좋은 와인’이라고 소개했다. 박 대표는 “아름답고 여성적인 텍스처(질감)를 강조해 아침에 마시거나 저녁에 자기 전에 한잔씩 마시기 좋은 맛”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한국 와인 시장이 성숙했다고 본다. 박 대표는 “어느 국가건 와인 시장이 막 조성되기 시작할 때는 과시하기 위해 마신다”며 “한국은 유행에 민감한 성향이 있지만, 이제 과시하는 단계를 넘어 와인이 대중화했고 그 안에서 선별이 이뤄지고 있고 다양하게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와인을 고르는 법에 대해서는 “내 입맛을 따르라”고 조언했다. 박 대표는 이노바투스 퀴베 레드와 잘 어울리는 음식으로 김치찌개를, 이노바투스 비요니는 부침개를 꼽았다. 박 대표는 “한국엔 ‘고기엔 레드 와인, 해산물에는 화이트 와인’이라는 얘기가 있던데 나는 생선에 피노누아(레드와인)을 곁들인다”며 “와인마다 가진 특징이 있고 저마다 입맛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먹었을 때 맛있다면 그걸 기억하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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