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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가 일주일 전 “은퇴할래?” 질문…전인지, 메이저 우승으로 답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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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3년8개월 만에 세계 여자골프 정상에 오른 전인지가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었다. 별명이 ‘플라잉 덤보’인 전인지가 마음의 짐을 떨치고 오랜만에 날아올랐다. [로이터=연합뉴스]

3년8개월 만에 세계 여자골프 정상에 오른 전인지가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었다. 별명이 ‘플라잉 덤보’인 전인지가 마음의 짐을 떨치고 오랜만에 날아올랐다. [로이터=연합뉴스]

전인지(28)가 27일(한국시각) 미국 워싱턴 DC 인근 메릴랜드주 콩그레셔널 골프장에서 벌어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 대회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마지막 날 3오버파 75타로 합계 5언더파를 기록, 렉시 톰슨(미국) 등을 한 타 차로 제쳤다. 우승 상금은 135만 달러(약 17억5000만원)다.

“이제 골프 그만하고 은퇴할래?”

대회 개막전인 지난 20일 골프장으로 가던 중 전인지의 코치인 박원 JTBC골프 해설위원이 물었다. 박 위원은 “요즘 의욕이 없이 경기하더라. 이렇게 시간을 보내느니 은퇴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의견을 물었다”고 말했다.

전인지는 6월 초 혼신의 힘을 다한 US오픈에서 15위에 그친 뒤 맥이 빠진 상태였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전인지는 가시 돋친 인터넷 댓글에 상처를 받았다. 더구나 어머니처럼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외로움이 커진 상태였다. 미국 생활 7년에 향수병과 우울증까지 겪었다.

전인지는 27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은퇴라는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선수 생활이 힘들지만, 스폰서와 팬들 응원에 보답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선생님이 은퇴라는 말을 꺼내니 당황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언니에게 전화해서 펑펑 울었다. 전인지는 “‘내가 왜 미국까지 와서 이렇게 해야 하나 서럽다’고 했다. 언니도 함께 울면서 ‘골프가 중요하지만, 너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그만두고 싶으면 바로 그만두라’고 했다”고 전했다.

“나는 어리광 받아줄 사람 필요했던 것”

전인지는 “그렇게 쉽게 그만두고 싶지는 않은데 너무 단호하게 말씀하셔서 서운하기도 했다. 쉽게 그만둘 거면 ‘내가 왜 지금까지 버틴 거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 과정에서 나는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라, 어리광 부리고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하단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 나의 행복을 위해 골프를 그만둬도 된다는,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실감했다. 그러면서 세상일에 감사하게 됐다. 그래서 전인지는 이번 대회에서 표정이 밝았다.

전인지

전인지

전인지는 1라운드에서 8언더파를 기록했다. 2위와 무려 5타 차였다. 코스가 너무 어렵다고 선수들이 불평했는데 전인지는 무아지경의 집중 상태에서 경기했다.

2라운드에서 3언더파를 더했다. 경기 내용이 1라운드만은 못했지만, 6타 차 선두가 됐다. 이 대회에서 2라운드 후 6타 차 선두는 뒤집힌 적이 없다는 통계 등이 나왔다.

좋은 게 아니었다. 절대 뒤집히면 안 되는 게임이 됐다. 전인지는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 집중력도 깨졌다.

전인지는 3라운드에서는 3타를 잃어 3타 차 선두가 됐다. 차근차근 올라간 3타 차 선두는 잡기 어렵다. 그러나 뒷걸음 친 3타 차라면 추격자들의 좋은 사냥감이 된다. 경쟁자들의 면면도 만만치 않았다. 메이저 우승자인 렉시 톰슨, 한나 그린, 김세영, 이민지에다 무서운 신인 최혜진, 아타야 티티쿨 등이 근처에 어슬렁거렸다.

최종 라운드 전날 밤 박원 위원은 전인지에게 “이번 대회에서 여러 경험을 했다. 무아지경 속에서 플레이하면서 코스레코드를 기록했고, ‘망신당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긴장감 속 경기도 해 봤다. 할 건 다 해 봤으니 남은 것은 재미있게 치는 것밖에 없다. 결과를 의식하지 말고 안 맞을수록 더 재밌고 즐겁게 치자. 그러면 기회가 온다”고 했다.

전인지는 최종 4라운드 티오프 직전 “정말 그 말 믿어도 되죠”라고 물었다. 물론 “믿어도 된다”는 답을 들었다.

LPGA 통산 4승 중 3승이 메이저 기록

마지막 날 경기는 역시 쉽지는 않았다. 전인지는 6번 홀까지 보기 3개를 했다. 동반자인 렉시 톰슨이 버디 2개로 역전했다. 9번 홀까지 전인지는 4타를 잃어 톰슨에 2타 뒤진 공동 2위 그룹으로 밀렸다. 흐름으로 봐서는 10위 혹은 그 아래로 밀려날 것도 같았다. 관심이 집중된 메이저 대회 최종 라운드에서 무너지면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전인지의 표정은 밝았다. 전인지는 후반 들어 버디 2개, 보기 1개로 한 타를 줄였다. 그러자 톰슨이 흔들렸다. 톰슨은 2017년 ANA 인스퍼레이션에서 4타 차 선두를 달리다 4벌타를 받고 역전패한 경험이 있다. 지난해 US오픈에서도  8홀을 남기고 5타 차 선두를 달리다 역전패했다. 이날도 선두로 올라가 쫓기게 되자 짧은 퍼트를 넣지 못했다. 마지막 7개 홀에서 보기 4개를 했다. 미국 골프위크는 “LPGA에서 가장 고통받은 톰슨은 이번 대회에서 다시 가슴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고 소개했다.

톰슨의 상처를 물려받을 뻔했던 전인지는 마지막 홀에서 1.2m 파 퍼트를 넣어 우승을 확정했다. 2018년 10월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이후 3년8개월 만에 LPGA 투어 정상에 올랐다.

전인지는 LPGA 투어 통산 4승 중 3승을 메이저 대회에서 거뒀다. 전인지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그 과정을 어떻게 즐기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나를 믿고 과정을 즐겨보자고 생각하고 플레이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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