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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만들어 팔수록 손해"…기업 20% "물가 뛰면 고용 줄이겠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연 매출 300억원 규모의 조명 생산업체를 운영하는 이모(47)씨는 최근 신규 영업은 거의 하지 않는다. 제품 생산에 들어가는 각종 원재료 가격이 지난해보다 60% 이상 올라 물건을 만들어 납품할수록 손해를 봐서다.

이씨는 “원재료 가격 상승분만큼 납품 가격을 올릴 수 없어 신규 수주를 할수록 손해가 커지는 구조”라며 “원재료 값 상승이 장기간 이어질 수 있는 만큼 하반기에는 공장 규모 자체를 줄이는 것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국 기업 10곳 중 4곳이 올해 원재료 가격이 지난해보다 20% 이상 뛴 것으로 조사됐다. 27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대형카트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뉴스1

전국 기업 10곳 중 4곳이 올해 원재료 가격이 지난해보다 20% 이상 뛴 것으로 조사됐다. 27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대형카트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뉴스1

치솟는 물가가 경기 침체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전국의 기업 10곳 중 4곳은 올해 원재료 가격이 지난해보다 20% 이상 뛰었다고 밝혔다. 물가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향후 고용 조정이나 신규 투자 축소를 검토하는 기업도 10곳 중 2곳이 넘었다. 스태그플레이션(경기 둔화+물가 상승)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27일 이런 내용을 담은 ‘지역경제보고서’ 냈다. 보고서에는 5월 12일~6월 2일 전국 570개 업체(응답 350개 업체)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가 담겼다. 설문대상은 한은이 각 지역의 경제활동 등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선정한 대기업(122개)과 중견·중소업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기업이 피부로 느끼는 비용 상승은 매섭다. 설문 응답 기업 중 40.1%가 지난해 대비 원재료 가격이 20% 이상 올랐다고 답했다. 원재료 가격 상승률이 50% 이상이라는 기업도 8.1%나 됐다. 특히 건설업체의 60.7%는 원재료 가격이 20% 이상 올랐다고 답했다.

앞으로의 상황도 만만치 않을 것이란 게 기업들의 전망이다. 올해 하반기에도 물가가 오를 것이라 예상한 기업은 86%로 조사됐다. 특히 건설업(94.8%)과 서비스업(88.6%)에서 물가가 더 오를 것이라는 응답이 더 많았다.

더 큰 문제는 기업의 비용 증가가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이미 기업 10곳 중 7곳(69%)이 원재료 가격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제품·서비스 가격을 인상했다고 답했다. 올해 판매가격을 인상하지 않은 기업(31%) 중 올해 내 가격 인상 계획을 가진 곳은 절반이 넘는 53%나 됐다.

그래픽=전유진 yuki@joongang.co.kr

그래픽=전유진 yuki@joongang.co.kr

다만 원재료 값이 오른 만큼 제품 가격을 올렸다는 업체는 거의 없었다. 가격을 인상한 업체 중 3분의 2는 원가 상승 중 20%만 가격에 전가했다. 가격 경쟁력이 낮은 기업은 생산 비용 증가를 제품 가격에 온전히 전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원자재 가격 상승을 이끄는 건 우크라이나 사태 등 대외 변수다. 응답 기업들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원재료 가격 상승(66.7%·복수응답)과 물류비 상승(36.1%), 수입 지연(18.2%) 등 공급망에 타격을 줬다고 응답했다. 실제 5월 수입 물가(원화 기준)는 1년 전보다 36.3% 올랐다. 원재료(71.6%)와 중간재(28.6%)의 상승 폭이 컸다.

응답 업체의 과반(59.1%)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올해 말까지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지만, 영향이 내년 이후(40.3%)까지 미칠 것으로 본 업체도 많았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인플레의 충격은 고용 축소와 신규 투자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 10곳 중 2곳은 향후 물가 상승에 대한 대응책(복수응답)으로 고용조정(22.7%)이나 신규투자 축소(22.7%)를 꼽았다. 특히 서비스업은 고용조정으로 대응하겠다는 응답이 32%로 상대적으로 높았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 명예교수는 “물가 상승에 대응한 임금 인상이 다시 물가를 끌어올리는 '임금 인상-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의 악순환' 초입에 들어왔다”며 “임금을 올린 만큼 수익성이 따라가지 못할 경우 서비스업에서는 고용이 줄어들 가능성도 높다”고 말했다.

물가 상승에 따른 금리 상승과 경기 둔화를 리스크 요인으로 꼽는 기업도 많았다. 기업들이 느끼는 대내외 리스크를 점수(100점 만점)를 매긴 결과 경기둔화(27.2점)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컸다. 이어 물가 상승(26.2점)과 물류 차질 및 지정학적 리스크(17.1점), 금리 상승(12.8점) 등이 뒤를 이었다.

각국 중앙은행의 긴축으로 경기 침체 우려는 커지고 있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도 지난 22일 처음으로 경기 침체 가능성을 인정했다. 연세대 성태윤 경제학 교수는 "한국 경제에도 스태그플레이션도 상당히 깊어진 상황"이라며 "물가를 잡기 위한 금리 인상 외에 세금 감면이나 노동시장 개혁 등 기업의 비용 부분을 절감해주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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