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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 없는 혐오 판친다…요즘 "틀딱""잼민" 이 말 폭증한 이유

중앙일보

입력

온라인 커뮤니티 내 혐오표현. 기사와 관련없음. AP=연합뉴스

온라인 커뮤니티 내 혐오표현. 기사와 관련없음. AP=연합뉴스

#경찰공무원을 준비하는 20대 A씨는 지난해 말 수험생 약 27만명이 있는 경찰공무원 시험 정보 제공 카페를 탈퇴했다. 필기시험을 약 4개월 앞둔 시기였다. A씨는 “여성 수험생과 남성 수험생 간 힐난하는 게시물이 너무 잦았다”며 “정보를 얻으려고 가입한 카페에서 스트레스만 받아 탈퇴했다”고 말했다

#지방 소도시에 사는 김모(59)씨도 최근 유일하게 가입한 온라인 거주민 카페를 탈퇴할지 고민하고 있다. 거리두기가 풀리며 생긴 노키즈존을 둘러싸고 회원간 설전이 오간 게시물을 보고 난 이후다. 김씨는 “할인 정보나 주민들이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자주 찾던 카페인데, 주민 간 싸움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는 게 답답했다”고 말했다.

온라인 커뮤니티가 주요한 소통 창구인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소수자에게 편중됐던 혐오 표현이 일반 시민으로 향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성균관대·아주대·중앙대·한양대의 교수 등 연구진이 참여한 '혐오표현 식별 AI 연구그룹'이 방문자 수가 높은 11개의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를 분석한 결과, ‘연령 혐오’와 ‘정치 혐오’가 온라인에서 가장 사용 빈도가 높은 혐오 표현인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틀딱’… “세대갈등 극심”

연구팀은 젠더·정치·연령·종교·인종·성소수자·장애인 등 총 7가지의 분야에서 각각을 대표하는 혐오표현 키워드 3~4가지를 선정했다.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 신설 초기부터 올해 초까지 사이트 내 게시물과 댓글 등에서 해당 키워드가 사용된 건수를 조사했다.

그 결과 틀딱(노인을 '틀니'에 빗대 비하하는 표현)·잼민(미성숙한 초등학생을 비하하는 표현)과 같은 연령 관련 혐오표현이 전체의 24.11%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다. 좌빨(진보 진영을 비하하는 표현)·수꼴(보수 진영을 비하하는 표현) 등 정치 관련 혐오표현(23.89%)이 다음으로 많았고, 성별(14.78%)·인종(14.16%)·종교(14.03%)·장애인(4.62%)·성소수자 관련 혐오표현(4.41%)이 뒤를 이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연구책임자인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혐오표현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며 “과거 혐오표현은 소수자 차별이 전제됐다면, 최근 혐오표현은 다수가 다수에게 향하는 형태”라고 분석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 결과가 한국 사회 내 가장 극심한 갈등이 세대 갈등인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고령화는 급격히 심화하고, 자산 가치 급등에 따라 세대 간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여기에 나아질 기미가 없는 청년 실업률로 높아진 청년 세대의 박탈감과 상실감이 세대 갈등의 원인”이라며 “추후 세대갈등이 한국 사회의 핵심 고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특정 계기 때 확산… 정치는 ‘탄핵’, 젠더는 ‘미투’ 

혐오 표현의 확산은 특정 사건을 계기로 증폭하는 경향을 보였다. 연구팀이 혐오표현의 빈도를 시계열로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다수의 커뮤니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전 대통령 취임이 맞물린 2017년에 정치 혐오 표현의 사용 빈도가 급격히 증가했다. 젠더 혐오의 경우 2018년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폭로로 촉발된 ‘미투 운동' 이후 급격히 늘기도 했다.

실제로 경찰공무원 준비생인 A씨도 지난해 11월 인천 층간소음 당시 순경이 현장을 이탈한 사건이 경찰공무원 준비생 카페를 탈퇴하는 시발점이 됐다고 말했다. A씨는 “그 사건 이후 여경과 준비생에 대한 인신공격성 게시물이 급격히 늘어났고, 이에 피로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지난 1월 8일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편파 판정' 논란이 불거진 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위터에서 실시간 트렌드로 거론되는 단어들 중 중국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트위터 캡처]

지난 1월 8일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편파 판정' 논란이 불거진 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위터에서 실시간 트렌드로 거론되는 단어들 중 중국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트위터 캡처]

“혐오표현 인지조차 못 하는 경우도”

구 교수는 "과거엔 온라인 표현이 뉴스 댓글 등 플랫폼 기업들 아래서 이뤄졌고, 플랫폼 기업들이 노골적인 혐오 표현의 경우 적절히 가려주며 대응을 했다. 이런 대응은 상당히 중요해서 명시적인 혐오 표현을 찾기 어려웠다"며 "하지만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상호작용이 늘면서 익명을 전제로 한 노골적인 혐오 표현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이어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용자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서로 동조하며 극단화되는 양상도 원인 중 하나”라며 “혐오 표현이 일상화되면서 일상이나 온라인에서 혐오표현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사용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연구팀은 이번 결과를 토대로 ‘혐오표현 AI 식별 모델’을 개발해 이를 온라인 커뮤니티에 보급한다는 계획이다. 사용자가 혐오표현을 작성하면 이를 인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차별금지법 등 제도적 해결책 외에도 온라인 공간이 스스로 자정작용을 하도록 하는 게 근본적 해결책이라는 분석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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