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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광형의 퍼스펙티브

1년 과정의 ‘마이크로 학위’로 반도체 인력 양성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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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반도체 인력 부족, 어떻게 풀 것인가

이광형 KAIST 총장·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이광형 KAIST 총장·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필자가 지난해 봄 KAIST 총장에 취임하고 약 한 달이 지난 때였다. 삼성전자가 계약학과를 만들어 반도체 인력을 양성해주기를 원한다는 요청이 들어왔다. 나는 큰 틀에서 먼저 합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에도 몇 차례 실무협의를 하다가 깨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즉석에서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총장 혼자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교수진 의견을 들어봐야 했다. 나는 전체 학과장 회의에서 KAIST가 지고 있는 국가적인 사명과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 학과장들은 대체로 찬성했다. 이렇게 하여 삼성과 반도체 계약학과 설립을 결정하게 되었다. 처음 말이 나온 지 약 한 달 만이었다.

이공계 대졸자를 1년 정도 강도 높게 교육하면
반도체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 양성할 수 있어
은퇴·기업 전문가 도움 받아 교수 요원 활용하고
지방 대학의 반도체학과 신설도 함께 추진해야

기정학 시대의 핵심 기술 반도체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인 지난 4월 29일 카이스트 부설 나노종합기술원을 방문해 반도체 웨이퍼 를 보고 있다. 속성으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는 ‘마이크로 학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인 지난 4월 29일 카이스트 부설 나노종합기술원을 방문해 반도체 웨이퍼 를 보고 있다. 속성으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는 ‘마이크로 학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뉴스1]

오늘날은 기술 패권이 국제 정치를 좌우하는 기정학(技政學) 시대다. 기존의 지리적인 위치가 중요한 지정학 시대에서 기술이 중요하게 되는 기정학 시대로 변하고 있다. 지난달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 때 평택 삼성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것이 단적인 증명이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우방국들과 함께 연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시점에서 전략 기술의 보유 여부가 중요해졌다. 미국 중심의 연합체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대접받고 국가 안전이 보장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반도체와 배터리의 주요 생산 국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도 기술동맹이 크게 강조됐다.

현대 문명은 인간의 지적 활동을 컴퓨터에 의존하며 발전하고 있다. 인간의 두뇌 대신에 컴퓨터가 계산해 주고, 기억해 주고 있다. 이제 인공지능 시대에는 의사결정까지 컴퓨터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 현대 문명이 발달할수록 빠른 계산력이 필요하고, 더 많은 기억 용량을 요구하고 있다. 컴퓨터 내에서 계산하고 기억해 주는 부품이 바로 반도체 칩이다. 그러니 반도체 칩은 현대 사회에서 대체 불가능한 제품이다. 거의 모든 기계 속에는 컴퓨터가 들어있기 때문에 기계를 작동하려면 반도체가 있어야 한다. 현재 차량용 반도체 품귀로 자동차 생산이 지연되고 있는 현상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반도체 공장이 멈추면 전체 산업이 멈춘다. 그런데 문제는 반도체를 생산하는 나라가 전 세계에서 몇 안 된다는 점이다. 한국·미국·대만·일본·중국 정도가 전부이다. 반도체 산업은 다른 산업에 비하여 후발주자가 따라 오기에 진입장벽이 높다. 우선 어마어마한 투자가 필요하다. 한 개 생산라인을 건설하는데 수조 원의 돈이 들어간다. 이러한 공장은 거의 모두 자동화되어 있다. 돈이 있다 하더라도 이처럼 완벽한 자동화 공장을 건설하는 일은 쉽지 않다.

또 공장을 건설하여 생산한다 해도 품질이 떨어지면 살아남기 어렵다. 제품의 합격률을 수율(收率)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처럼 안정된 생산 공장을 가진 나라의 수율은 99%에 가깝다. 수율이 낮은 후발주자들은 초격차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한 국가라 하더라도 정교한 생산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반도체 생산 국가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반도체산업 육성이 곧 국방력 강화

반도체를 설계하고 공장을 운영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반도체 인력은 수학·과학을 바탕으로 밀도 있는 교육을 받아야 하므로,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반도체 인력 양성의 어려움은 반도체 생산에 필요로 한 전공이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전자공학을 공부한 사람만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현장에서는 전자공학뿐 아니라 컴퓨터·물리·화학·신소재·화학공학·기계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인력이 필요하다. 공과대학의 거의 모든 전공이 필요할 정도이다. 필자는 한때 어린 대학생이 반도체라는 좁은 분야를 공부하면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반도체 분야를 지금 깊이 들여다본 다음에는 그런 걱정이 없어졌다.

이처럼 현대사회에서 필수 부품인 반도체가 독과점 형태로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불안감이 이해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가 산유국이 되지 못한 설움을 반도체가 대신 갚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언젠가 어떤 이유에서 ‘석유 무기화’처럼 ‘반도체 무기화’가 이루어진다면 세계 경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제 반도체산업을 육성하는 일은 국가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 되었다.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는 일은 군인을 양성하는 일과 비슷한 정도로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래서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반도체 인력 양성을 강조하고 있다. 당선인 시절에는 KAIST의 반도체 나노팹을 방문하여 연구원과 학생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국무위원들에게 반도체 공부를 하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반도체 산업이 방위산업 수준으로 중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해보면 우수한 젊은이 1000명을 휴전선에 배치하는 것 못지않게, 반도체 생산라인에 배치하는 것도 국가 안보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일석이조 지방대 반도체학과 신설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사람은 정원을 늘려서 학생만 뽑아서 가르치면 될 것이라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력 양성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가르칠 교수 요원 확보가 필요하다. 또 실험실습 장비가 구비되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클린룸 공사비만 수백억 원이 소요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단기간에 확보되기 어렵기 때문에 인력을 활용할 기업체의 도움이 필요하다. 기업체에 있는 현장 전문가와 은퇴 전문가가 교육에 참여해야 한다. 특히 은퇴 전문가의 활용은 기술의 해외 유출을 예방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 되기도 한다. 중국이 한국의 은퇴 기술자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 실험실습도 기업체 시설을 활용하는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학생 기숙사도 필요하다.

필자는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현재 많이 논의하고 있는 반도체 입학 정원을 확대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수도권 규제와 지방대학 소멸이라는 민감한 사안이 얽혀 있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필자는 수도권 이외의 지역 대학에 반도체학과를 신설하는 것도 좋은 안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수도권에만 좋은 대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방에도 좋은 대학이 있고, 또 이 기회에 좋은 대학으로 육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KAIST의 마이크로 반도체 학위

두 번째 방법은 마이크로 학위(Micro Degree)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다. 마이크로 학위는 정규 학위가 아니라, 대학에서 발행하는 일종의 수료증이다. 기존의 한두 달 단기 교육 후에 수여하는 수료증보다 교육의 양과 강도를 높여서 발행하는 학위이다. KAIST에서는 마이크로 학위 제도의 본격 시행을 앞두고 있다. KAIST가 구상하는 마이크로 학위는 다음과 같다. ▶수강 자격은 4년제 대학 졸업자로 하고 ▶석사 과정의 절반 정도의 교육을 받아야 하며 ▶정규 수업처럼 시험을 보고 학점을 받고 ▶수업은 온·오프라인으로 진행할 수 있으며 ▶실험실습은 철저히 한다. 이상의 조건을 만족하여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약 10개월 정도의 교육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KAIST가 반도체 마이크로 학위를 시행하면 다양한 전공의 일반 대학 이공계 졸업자를 뽑게 될 것이다. 반도체 분야에는 여러 분야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양한 이공계 교육을 받은 사람이 더욱 좋다. 이들은 이미 기초 교양과목과 전공 공부를 했기 때문에 입학 후에 직접 반도체 교육에 들어갈 수 있다. 교수 요원은 앞서 언급했듯 기업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정규 학생을 선발하여 교육하면 졸업까지 4년이 걸리고, 또 병역까지 마치려면 약 6년 후에야 산업 현장에 투입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이크로 학위 과정은 대졸자를 대상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1년 후면 현장 투입이 가능하다. 이 제도는 대학 학과별 정원의 경직성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은 대학을 5년 다녀서 원하는 전공으로 졸업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국가의 많은 혜택을 받으며 성장해온 과학기술자들은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다 생각하면 모두 나서서 힘을 보태는 경향이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애국은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을 더욱 튼튼히 만들어서 국가 안보를 든든히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광형 KAIST 총장·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