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수정의 시선

메르켈과 사르코지의 달라이 라마 대처법

중앙일보

입력 2022.06.27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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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만난다" 하고 만난 메르켈 보다  

중, "안 만난다" 번복 프랑스 보복

사드 등 대중 외교 시사점 찾아야

김수정 논설위원

김수정 논설위원

  달라이 라마(87)는 중국이 극도로 민감해하는 존재다. 티베트 불교의 수장이자 망명 정부 지도자로 서구에선 교황처럼 '성하'(聖下·His Holiness)로 불린다. 중국의 지정학·전략적 '핵심이익'에 해당하는 이슈인데, 종교 자유와 인권 차원에선 아킬레스건이다. 그가 한국에 한 번도 오지 못한 건 한·중 수교 이후 역대 정부를 상대로 계속된 중국의 압력 때문이다.
중국이 도광양회(韜光養晦·몸을 낮추어 때를 기다림)에서 G2의 화평굴기(和平崛起·평화롭게 우뚝 섬)태세로 전환한 후진타오 주석 때 달라이 라마 이슈는 국제 외교 전면에 등장했다. 2008년 5월 27일 이명박 대통령이 국빈으로 베이징에서 후 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다.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관계를 격상키로 하는 등 준비 때부터 분위기는 좋았지만 후 주석은 회담에서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지 말아달라'는 얘기부터 했다(이명박대통령 회고록『대통령의 시간』)고 한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계속 견지해달라는 주장이었다. 당시는 이미 독일이 중국의 '달라이 라마' 펀치를 맞고 있을 때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0일 서울 용산 집무실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특사로 취임식에 온 왕치산 부주석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왕치산 부주석은 이날 접견에서 "민감한 문제의 타당한 처리"란 말로 사드 문제를 언급해 논란을 불렀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중앙일보 강정현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0일 서울 용산 집무실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특사로 취임식에 온 왕치산 부주석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왕치산 부주석은 이날 접견에서 "민감한 문제의 타당한 처리"란 말로 사드 문제를 언급해 논란을 불렀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중앙일보 강정현 기자]

2007년 8월 방중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후진타오는 같은 주문을 했다. 메르켈은 "독일은 어두운 역사(나치의 유대인 학살)가 있다. 인종·종교·문화적 차이로 만남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 달 뒤 베를린 총리실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고위급 회담 취소, 투자 취소 등 중국의 보복이 시작됐다. 메르켈은 "나는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날 뿐"이라고 했다.
그해 11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베이징에서 후 주석을 만났다. 200억 유로 투자약정을 체결했다. 후진타오의 예의 그 요구에 사르코지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단다. 그랬는데, 이듬해 12월 바르샤바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관련 행사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중국 언론은 사르코지를 "말 바꾸기의 귀재, 신의 없는 자"라고 공격했고, 에어버스 항공기 150여대 구매 협상 취소 등 거친 보복이 이어졌다.
중국의 독일 때리기는 느슨해진 뒤 2008년 10월 정상회담으로 풀렸다. 하지만 중국·프랑스 관계는 2010년 4월 말 상하이 엑스포 때 사르코지가 베이징을 찾은 뒤에야 회복됐다. 후진타오가 '메르켈은 거짓 약속을 하지 않았다. 뒤통수 때린 사르코지는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는 말이 당시 베이징 외교가에 돌았다. 외교 소식통은 "독일 외교관들이 '우리가 더 스마트했다'고 농 섞어 자랑한 기억이 난다"고 했다.
중국이 경제적 힘을 외교 무기로 휘두르는 사례를 여러 나라가 익히 겪었다. 우리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을 6년째 당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세계는 민주 자유 대 권위주의 진영의 신냉전 구도로 들어갔고, 한국의 새 정부는 미·중 사이 전략적 모호성을 털어냈다. 한국 외교의 최대 도전은 대중 관계일 터다. 메르켈과 사르코지의, 서로 다른 달라이 라마 대처법이 열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드 이슈는 박근혜 정부가 북한 문제 돌파구를 중국에서 찾으려 대중 외교에 공을 들일 때 불거졌다. 사드에 대해 '3NO'(요청·협의·결정 없음) 논리를 견지했고, 국론은 분열됐다. 2016년 북한 핵실험 후 쫓기듯 사드 배치를 발표(7월 8일)했다. 중국은 황교안 총리가 시진핑 주석을 만나 "정해진 바 없다"고 하고선 8일 만에 발표했다는 메시지를 조야에 흘려 왔다. 시 주석의 체면을 깎았다는 주장이다. 사드 보복을 정당화하려는 여론전일 수도 있지만, 우리 정부도 "사드 배치 여부는 안보 주권 사항이고 한·미동맹의 결정이다. 중국을 겨냥한 것도, 중국이 관여할 바도 아니다. 중국이 북핵 문제에 나서면 해결될 일"이라고 일관된, 단호한 메시지를 시종 냈어야 했다.
중국은 윤석열 대통령이 29~30일 스페인에서 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 초대받아 참석하는 것에도 날을 세우고 있다. 존 커비 백악관 NSC 조정관의 말처럼, 한국이 어떤 회의에 참여하는지에 대한 중국의 거부권은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21세기에도 주권과 영토가 무력 침공당하는 것을 목도했다. 북한 핵미사일은 더 고도화했다.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같은 가치를 지닌 우호국 네트워크로 중층적 안보를 확보하는 게 국익에 부응한다는 건 상식이다.
16년 집권한 메르켈은 인권, 국제규범 준수 등 확고한 원칙 속에 '밀당'을 해가며 유연하게 중국을 대했다. 그의 외교력은 독일을 유럽의 '병자'에서 '대들보'로 바꾼 힘이 됐다는 평가다. 8월 24일은 한·중이 과거를 뒤로하고 미래를 위해 수교한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중국이 개입하기 좋은 나라가 돼버린 현실이지만, 이제라도 대중국 외교 원칙을 확고히 세워야 한다.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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