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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장으로 읽는 책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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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충분하다

충분하다

‘레이크스 미술관의 이 여인이/ 세심하게 화폭으로 옮겨진 고요와 집중 속에서/ 단지에서 그릇으로/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한/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지난주 이 자리에 쓴 김소연 시인의 에세이집 『어금니 깨물기』에서 ‘비미(非美)의 미’의 시인으로 소개된 쉼보르스카를 꺼내 읽는다.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유명한 그림 ‘우유 따르는 여인’을 소재로 한 시 ‘베르메르’의 전문이다. 쉽고 짧고 명징하다. 우유를 따르는 일상과 노동의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의 숨 멎는 듯한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질 뿐만 아니라 우유를 따르는 일상이 계속되는 한 삶은 이어지며 순간은 영원이 된다고 말하는 시다. 미술관 그림 앞에 홀린 듯 골똘한 표정을 짓고 선 이들이 절로 떠오르기도 한다.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쉼보르스카는 익숙한 모티브를 독창적으로 변주하며 일상과 생명을 긍정한 시인이다. 한국어판 『충분하다』는 생전 마지막 시집 『여기』와 유고시집 『충분하다』를 엮은 책. 시인이 제목으로 미리 정해뒀다는 ‘충분하다’는 삶의 막바지, 그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가장 좋은 경우는/ 나의 시야, 네가 꼼꼼히 읽히고,/ 논평되고, 기억되는 것이란다.// 그다음으로 좋은 경우는/ 그냥 읽히는 것이지. //세 번째 가능성은/이제 막 완성되었는데/ 잠시 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나의 시에게’ 부분)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모든 시가 첫 번째 경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