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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6월 수상작] 수박 고르는 과정, 상상적 변용 돋보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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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장원

수박을 썰다
한명희

몇 번을 두드린다 네 문을 열기 전에
손가락 움켜쥐고 가만히 귀 기울여
쓰라린 햇살을 찢는 바람 든 숱한 날들

붉은 살에 까만 사리 콕콕 박힐 때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속으로 울었을까
그 소리 발효된 자리 통통통 꽃 핀 공명

문 열어도 좋다는 맑고 고운 호흡들
한 입 가득 붉은 말이 달디 달게 스민다
내 안의 울음을 품고 수박을 쪼갠다

◆한명희

한명희

한명희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재학 중. 2021년 한국방송통신대 문연학술문학상 수상.

차상


김영희

한 획을 잘못 그어 얼룩진 화선지에
새 붓을 바꿔들고 마음잡고 앉았지만
비껴난 작은 획 하나 얼룩으로 남았다

지나온 걸음마다 궤적이 그려지니
나가고 들던 길목 허방에 남은 흔적
한 장만 새로 써 들고 다시 갈 순 없을까

세상사 가치들을 붓으로 적어보니
백지 위 그린 세상 너와 나 다름없어
빛내며 걷고 싶은 길 지워내며 걷는다

차하

감자 캐기
장애린

밭이랑 사이에도 밤하늘이 있었다
할머니가 캐어 올린 뿌리는 북두칠성
뚝 잘린 작은개자리 어설프게 집어든 나

이달의 심사평

초록이 우거지는 계절이다. 보내온 응모작 또한 이 계절의 초록처럼 짙고 풍성하기를 기대하면서 심사에 응했다. 이번 달 장원작품은 한명희의 ‘수박을 썰다’로 선했다. ‘수박’이라는 대상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을 넘은 상상적 변용이 돋보인다. 첫수 초장의 산뜻한 도치법 활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시작부터 시선을 끄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수박을 고르면서 수박이 익기까지의 과정을 감각적인 비유로 형상화하였다. 다만 마지막 수의 종장이 앞에서 전개된 시적 의미를 받쳐주지 못하고 쉽게 풀려버린 아쉬움이 있다.

차상으로 선한 김영희의 ‘붓’은 빈 화선지 위에 한 획씩 글씨를 써나가는 과정을 통한 성찰의 마음가짐을 차분한 어조로 잘 직조하였다. 시적 대상과의 감정적 거리가 과하지 않고 유려하게 전개된 점은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궤적이 그려지니’, ‘붓으로 적어보니’ 같은 고시조 풍의 어미처리가 거슬렸다. 분명한 종결형으로 처리하였다면 제재의 진부성이 주는 지루함과 익숙함을 조금 비켜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차하는 장애린의 ‘감자 캐기’다. 지상의 밭에 밤하늘을 끌어들이고 거기서 캐낸 감자알에 북두칠성을 덧입힌 신선한 비유가 좋았다. 중장과 종장에서 ‘할머니’와 ‘나’의 대비를 좀 더 선명하게 거둘 수 있는 시적장치를 고민했더라면 단수의 완성도가 더 높아졌을 것이다.

대부분의 응모작들이 시조를 고시조의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현대인의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과 정서가 더 짙게 담겨져야 할 것이다. 조성연· 이유민의 작품들도 충분히 관심을 끌었으며 그 가능성을 점쳐본다.

서숙희(대표집필), 손영희 시조시인

초대시조

연화도(蓮花圖)
용창선

늙어가는 물의 경전 연못을 건너가면
천리 밖 바람결도 목덜미를 종그는데
진흙탕 즈믄 강 위로 갇힌 생이 올라온다.

한여름 내린 비에 서글픔이 망울지고
득음의 목청이 누군가의 꽃이 되면
노을에 곡비 부르는 붓놀림이 오롯하다.

지난 날 뒤척임은 사바의 시간인가
푸른 우산 틈 사이로 뼈 세워 태운 열꽃
희고도 붉어진 설움 병풍 속에 터트린다.

◆용창선

용창선

용창선

201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조시학 젊은시인상 수상. 현 목포시조문학회장, 목포대 강사. 시집 『세한도를 읽다』, 학술서 『고산 윤선도시가와 보길도 시원연구』 등.

연꽃의 계절이다. 연화지마다 연꽃이 만발했다. 연화지를 찾는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연꽃을 담아가느라 분주하다. 연꽃이 어디 그냥 피는 꽃이던가. 연꽃은 연꽃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저마다 색색의 사연을 안고 있다. 연꽃을 보는 이는 저마다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다. 연꽃이 피는 연화지에는 ‘천리 밖 바람결도 목덜미를 종그’는 바람이 분다. ‘종그다’는 ‘벼르다’는 뜻의 전라도 말인데, 천리 밖 바람결이 연꽃의 목덜미를 벼르고 불어오다니! 바람이 목에 감기는 그 느낌, 오메! 좋구나!

화자는 지금 병풍에 연꽃을 그리는 화가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듯하다. 연꽃이 피어나는 과정과 화가가 살아온 삶이 병풍 위에 펼쳐진다. 진흙을 뚫고 올라오는 연꽃과 마음 속에 가라앉은 서글픔, 설움을 딛고 붓을 잡아 ‘물의 경전’을 건너는 화가의 삶이 나란하다. 삶의 희로애락은 더하고 덜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 ‘한여름 내린 비에 서글픔이 망울’이 되었다가, ‘득음의 목청’이듯 망울은 화사한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니, 곡비 소리가 한으로 녹는 노을이 붉어질 때 화가의 붓놀림은 정점에 다다르듯 오롯하고, 오롯하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연꽃을 지탱해주는 연잎과 연대가 ‘푸른 우산’이 되어 뒤척이는 ‘사바의 시간’을 견디게 할 때, ‘희고도 붉어진 설움’을 안고 화가는 병풍의 연화도를 완성한다. 이윽고 화자의 눈이 연화지의 연꽃에 가서 젖는다. 희로애락을 안고 삶의 정점에 다가가려는 노력과 숨결이 연화도에 펼쳐졌다. 연화도에 그려지는 ‘물의 경전’과 ‘사바의 시간’이 불가의 인연이라면, 득음과 곡비, 서글픔과 설움은 연화도를 보는 화자의 가슴에 얼비치는 삶이다. 이는 곧 시인이 살아온 삶의 그림이라 해도 무방하다.

김삼환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의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 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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